[최규철칼럼]‘정치세탁’의 후유증

  • 입력 2002년 1월 2일 18시 13분


새해는 나라 안팎으로 유난히 많은 일들이 이월(移越)된 한 해다. 지난해 ‘9·11테러’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각 분야에서 ‘미국 제일주의’강풍이 몰아칠 것인데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이 하필이면 새해를 ‘전쟁의 해’라고 언급한 것도 찜찜하다.

나라안 사정도 몇 조원의 돈이 걸린 건강보험재정 문제, 찬반이 첨예한 교원정년 문제, 기업의 통합 및 혁신 문제, 정치개혁 등 새해로 넘어 온 난제가 손꼽을 수 없을 정도다. 모두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개혁이란 이름으로 벌여 놓은 일들로 이제는 움치고 뛰기조차 힘들게 꼬여버려 국가운영의 큰 부담이 되고 말았다. 새해 임오년(壬午年)은 씁쓸한 역사적 기록도 갖고 있다. 120년 전(1882년) 고종 땐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군인들의 난리가 벌어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결국 국권을 잃는 실마리가 된 제물포조약이 있었고, 또 그보다 120년 전(1762년)엔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임오옥(壬午獄)이 벌어졌다.

▼‘돈세탁’보다 무서운 결과▼

각설하고 올해 한국사회의 화두는 단연 12월 19일의 제16대 대통령선거다. 대통령선거와 관련해서 우리에겐 딴 나라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괴이한 현상이 있다. 바로 ‘정치세탁’이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 추종세력들의 환호열풍이 불어치는 가운데 당선자에 대한 철저한 정치적 성형수술이 벌어진다. 성장과정, 학력 및 사회적 경력, 정치적 언동과 궤적 그리고 역사관 등 모든 것이 일순 탈색 변색 미화된다. 정경유착의 정치자금 수수같이 지난날의 칙칙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은 덮인다. 대통령의 권위와 위엄을 위해서라는데 이 무렵 누가 감히 토를 달겠는가.

이렇게 시작된 인위적인 윤색은 임기 내내 계속된다. 이 과정에서 측근이니 가신이니 하는 핵심 추종세력들은 발호하기 마련이며 훗날 터지고 마는 권력형 비리의 거대한 고리도 굳어지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한 사람의 실체를 호도하고 모든 것을 과대포장한다. 급기야 당선자는 전지전능의 자기최면에 빠지고 그때쯤엔 무소불위의 권력만이 눈에 들어오기 십상이다. 국정운영을 보복과 시혜로 단순화시키는 유혹도 받게 된다. 국민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세탁’은 ‘돈세탁’보다 더 무섭다.

권력응집 현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변에선 당선자의 언동 하나하나에 벌써 대통령권위를 부여하려는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한다. 자신들의 위세도 함께 높이자는 속셈이지만 결과적으로 후에 대통령의 리더십을 망가뜨리는 일이란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리더십 자질이란 것이 어디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인가. ‘정치세탁’은 취임식 전후 2개월 동안 주로 이루어진다. 한 정권의 행로가 이미 그때 결정된다는 말이다.

한국선거에서 또 한 가지 괴이한 현상은 같은 뿌리의 정파 후보가 자신의 정치적 대부를 시쳇말로 ‘까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를 밟고 가라’는 말이 왜 나오는가. 정책적 패착이든, 권력형 비리든, 인사난맥이든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집권세력 스스로 인정한다는 말이 아닌가. ‘정치세탁’을 거치긴 했으나 결국 리더십의 문제가 드러났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둘러댄 말이다.

군사정권 대통령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통령이다. 과연 국민의 마음에 와 닿은 대통령을 몇 사람 가져 본 적 있는가. 민정시찰 자주하고 공장방문 많이 했다고 국민에게 가까운 대통령이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행사의 번거로움이 그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대통령은 임기 동안 국정운영을 잘하라고 막강한 권한과 막중한 책임도 함께 위임받은 것이지만 취임 순간부터 책임은 저만치 가고 권력만 집중된다. 그래서 국민과 멀어진다.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세탁’의 후유증 때문이 아닌가.

▼정권행로, 초기에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정치세탁’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을 찾는다. ‘나만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며 덮고 감추는 점령군사령관이 아니라 약점이나 부족한 것도 솔직히 드러낼 줄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 골치 아픈 일 많은 한 해, 한번 제대로 대통령을 뽑아본다는 것은 위안이다. 되풀이하지만 정권의 운명은 정권구성 초기에 결정된다. 일생을 사는 지혜를 유치원 때 다 배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첫 단추를 어떻게 꿸 후보인가를 염두에 두고 올 한 해 대통령선거를 지켜보자.

논설실장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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