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리스탄과 이졸데/조제프 베디에 지음 최복현 옮김/234쪽 8000원 사군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모든 비극적인 러브스토리의 원형이자,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켈트족 설화로 추정되는 이 슬픈 이야기는 12세기에 등장한 이래 불문학, 독문학, 영문학 등 서구문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원탁의 기사 랜슬롯과 비련의 왕비 귀느비에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탕달의 '적과 흑',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그리고 로렌스의 '채털레이 부인의 연인'같은 수많은 문학작품들 속에 부단히 투영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말로리나 테니슨이나 아놀드 같은 대가 급 시인들도 이 두 비극적 연인들에 대한 작품을 썼으며, T.S. 엘리엇 또한 '황무지'의 서두에서, 이 작품의 한 구절을 인용했고, 토마스 만은 '트리스탄'이라는 중편소설을 썼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만인의 사랑을 받게된 데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불후의 명작 가극으로 승화시킨 바그너의 공이 컸다. 이 작품의 제목이 독일어식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널리 알려진 이유도 바로 바그너와, 이 작품의 독일어판을 쓴 중세작가 아일하르트와 고트프리트 덕분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프랑스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2세기 음유시인 베룰과 토마스가 쓴 프랑스어판은 초기 결정판들 중 하나이며, 1900년에 조제프 베디에가 소설화한 '트리스탄과 이즈 이야기' 또한 프랑스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근 국내에서 출간된 '트리스탄과 이즈'(궁리)와 '트리스탄과 이졸데(사군자)는 모두 베디에의 원작을 번역한 것이다. 전자는 현재형으로 번역해 생생한 현장감과 서사시적 분위기를 살렸고, 후자는 과거형으로 번역해 로망스 소설처럼 읽힌다. 특히 이형식 교수가 번역한 '트리스탄과 이즈'는 리드미컬하고 시적인 원작을 그대로 살린 유려한 문장과 정확한 번역이 돋보인다.
'트리스탄과 이즈'(이즈는 이졸데의 프랑스식 이름)는 테니슨의 장시 '이노크 아덴'이나 롱펠로의 '에반젤린'처럼 애틋한 사랑이야기지만, 웅대한 서사시적 구조로 차별화 된다.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가 죽은 '트리스탄'(어원은 '슬픔의 사람')은 숙부인 콘월 왕 마크의 슬하에서 훌륭한 기사로 자라나고, 아일랜드의 거인기사 모르홀트를 죽여 나라에 공을 세운다.
어느 날, 트리스탄은 숙부 마크 왕의 신부를 구하러 아일랜드로 떠나 의술의 달인이자 '금발의 이즈'라 불리는 아름다운 공주를 신부 감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항해도중 실수로 하녀가 갖고있던 사랑의 묘약을 나눠 마시게 된 둘은 그만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은 시작된다.
왕국에서 추방당한 트리스탄은 끝없는 방랑 끝에 다른 나라로 가서 '흰 손의 이즈'라 불리는 동명이인 공주와 결혼하게 되지만, 끝내 '금발의 이즈'를 잊지 못한다. 전투 중, 독을 바른 검에 찔려 위독한 트리스탄은 친구를 보내 유일한 희망인 '금발의 이즈'를 부른다. 그는 돌아오는 배에 이즈가 탔으면 흰 돛을, 안 탔으면 검은 돛을 달아주기를 부탁한다. 이윽고 '금발의 이즈'가 탄 배가 다가오자, 질투에 휩싸인 '흰 손의 이즈'는 돛이 검은 색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 순간 절망에 빠진 트리스탄은 숨을 거둔다. 이윽고 도착한 '금발의 이즈' 역시 비탄 속에서 트리스탄의 옆에 누워 숨을 거두고 만다.
모든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이 지고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는 인습에 도전하는 정열의 승리를, 그리고 그 승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삶의 역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트리스탄과 이즈'는 고귀한 신분의 여인을 연모하는 기사의 이야기를 다룬 중세 로망스의 전범이자,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애틋한 러브스토리다.
다음은 지면이 짧아 미처 쓰지 못했으나 재미있고도 중요한 논의사항들이다.
1. 왜 트리스탄과 인연을 맺는 두 여자의 이름이 모두 이즈(이졸데) 일까? 트리스탄이 사랑하는 여인은 '금발의 이즈'이고, 결혼하는 여인은 '흰 손의 이즈'인데, 이것은 트리스탄이 금발의 이즈를 끝내 못 잊어 결혼도 같은 이름을 가진 여인과 하게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이 세상에 이즈를 대신할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의 암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금발의 이즈'는 작품 초반에 의술의 달인으로 제시된다. 그녀가 트리스탄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모두 치료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치료사라는 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죽어 가는 트리스탄이 그녀를 부른 것 또한 그녀의 그러한 능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영원히 갈라놓는다. 다만 죽음만이 그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을 뿐이다.
3. 금발의 이즈가 배에 탔으면 흰 돛을, 안 탔으면 검은 돛을 달고 오라고 부탁하는 것, 그리고 잘못된 돛의 색으로 인해 주인공이 죽는 것은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 이야기에서도 나오지만,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설화에서도 발견된다.
4. 트리스탄은 거인이나 용을 퇴치하면서 인정받고 성숙해지는 훌륭한 기사이자 전형적인 영웅인데, 다만 한 여인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는 진정한 사랑이야말로 세속적인 명성이나 사회적 신분, 또는 정치적 야망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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