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박태하가 말하는 박태하 (취중진담)

  • 입력 2002년 1월 7일 13시 51분


오늘은 사적인 이야기지만, 결코 사적일 수 없는 이야기를 할까 한다. 그냥 사적인 기억으로만 남기기에는 너무나도 멋진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의 이야기도 아니고 수백, 혹은 수천 만 명이 박수를 보내는 화려한 스타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보통 사람이기에는 좀 크고 존경할만한 사람, 묵직한 위엄과 걸죽한 맛을 풍기는 한 축구 선수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박태하!

1991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으며 2001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된 선수. 한 때 팀 동료였던 홍명보나 황선홍처럼 국가대표 팀의 10년 아성을 쌓은 선수는 아니지만, '미스터 포항' 또는 '포항 맨'이라는 애칭을 달고 다니는 '진짜 포항 사나이'이다. 포항 인근의 강구라는 곳이 고향이고 포항 스틸러스의 제1호 연고지명 선수이기도 하다.

강구초등학교, 강구중학교, 경주종고, 그리고 대구대학교.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기 전까지 박태하의 이력은 이렇다. 소위 잘 나간다는 명문의 딱지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이력서를 가지고 그는 성실과 노력, 투지라는 것을 무기로 프로 팀 포항 스틸러스의 간판 선수이자 한국 프로축구 올스타 및 시즌 베스트 11, 그리고 국가대표 유니폼까지 입었다. 단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았으며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부상이나 슬럼프 없이 260게임 이상을 소화했으며 선수로 뛰는 동안 포항 스틸러스 부동의 왼쪽 공격수이자 17번 유니폼의 영원한 주인공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선수.

화려한 스타성 보다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매너와 혼신의 힘을 다하는 투지가,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스타일 보다는 빠르고 경쾌한 돌파와 센터링, 그리고 골키퍼 보다 높이 솟구치는 가공할 헤딩력이 그의 주무기였다. 평소 말이 없고 어눌한 인상이지만 후배 선수들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선수이자 말 보다는 실천으로 팀을 이끄는 정신적 지주이며 주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포항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대표적인 지역 스타이기도 하다.

같은 포항 출신 토박이 스타인 이동국이 세련된 모습과 화려함, 신세대적인 도회풍의 이미지로 어린 세대에 어필하는 반면, 박태하는 걸걸한 포항 사투리와 촌티가 물씬 풍기고 바닷가 촌놈 냄새가 팍팍 묻어 나는, 하지만 묵직한 신뢰와 말없는 미소가 가져오는 또 다른 형태의 매력을 가지는 포항 스틸러스의 스타이다. 포항 팬들은 그런 박태하를 유난히 좋아한다. 편하게 다가설 수 있고, 또한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지역 사람들이 그에게 유난히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경기장을 찾으면 변함 없이 볼 수 있는 선수이기에, 결코 다른 팀과 다른 도시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친근감이 있기에… 박태하는 '미스터 포항'이라는 닉네임과 익숙해질 수 있었던 모양이다.

12월 초였다. 평소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던 그에게서 느닷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의례 한 시즌을 마친 후에 주고받는 고마움과 덕담이 오고 갔다. 그의 입에서 "이제 은퇴해야 안되겠나…" 하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동안 참 고마웠고…" 하는 투의 말들이 그저 일상적으로 나누었던 시즌 말미의 인사인줄만 알만큼 박태하의 은퇴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최소한 밖에서 보기에 기량이나 체력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가 늘 전성기의 활약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포항의 왼쪽 공격 라인에서는 박태하를 능가할 선수를 아직은 볼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은퇴라니! 본인 역시 체력적인 문제라든가 기량 문제, 혹은 부상 때문은 아니라고 말을 했다. 내게 전화를 할 때는 이미 일주일 가량의 고민을 한 후였으며 FA 자격으로 팀을 옮길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포항에서의 선수 생활은 이제 끝을 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꼭 포항이 아니더라도, 혹 포항에서 뛸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팀을 바꿔서라도 뛰고 싶은 만큼 뛰어야 하지 않겠는가, 은퇴하고 나서 아쉽지 않겠는가 하는 제안을 해 보았지만… 이미 은퇴하는 쪽으로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지난 2001 시즌이 자신에게 매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최순호 감독 체제로 전환하면서 팀도 변화를 하게 되고, 하석주 같은 노장이 영입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세대교체도 많이 이루어졌고, 무엇보다도 감독이 추구하는 스타일과 자신의 스타일이 다른 상황에서 10년간 이어 온 스타일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도 없었기 때문에 풀 타임 출전 횟수도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많이 위축되고 조급해 지기도 했다는 이야기 등을 전화로 나누었다. 그리고, 오는 주말에 소주나 한 잔 나누자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간만에 포항을 찾았다. 낯설지 않은 도시와 풍경들. 타고 있는 고속버스가 경기장으로 직행할 것 같은 흥분. 그리고, 박태하의 얼굴과 묘한 안타까움, 초조함, 그리고 반가움. 예상 시간보다 1시간 반이 늦어서야 그와 만났다. (마침 박태하는 바로 전날 둘 째 아이를 얻었다.)

"포항 왔으모 회 묵으야제?"

일단 그를 알아본 팬들에게 몇 장의 사인을 해 주고, 회 한 접시와 소주 몇 병을 놓고 잔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박태하는 그 동안의 고민과 자신의 생각, 심정, 선택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 했다.

(박태하 선수는 오리지널 포항 사투리를 씁니다. 이야기 전달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대화 내용은 표준말로 번역(?) 했으며, 취중에 나눈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 기억을 바탕으로 다소 편집하였습니다. 저 또한 취중의 기억을 끄집어 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기분에 취하기 위해 지금도 술을 한 잔 걸친 상태로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_^)

"나 입단할 때 최감독님 현역 은퇴 하려고 그러던 때였다고. 그 때 느꼈지. 저런 대스타도 은퇴할 때는 초라하기도 하고, 구단과 실랑이도 하고… 10년 뒤에 내가 그런 입장이 되고 보니까… 참…"

그가 은퇴하게 된 정확한 배경은 감독의 권유(?) 때문이었다. 홍명보가 계약을 위해 포항에 왔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식사도 하고 술도 한 잔 나누던 자리였는데, 우연히 둘만이 함께 한 짬에 최순호 감독으로부터 은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내년(2002년)에 스카우터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술을 몇 잔 주고 받으면서… 나로서는 감독과 구단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에 애정이 이토록 많고, 또한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뛰었으며 팀 공헌도 또한 최고를 자랑하는 선수인데… 그렇게 쉽게 그의 은퇴 이야기가 나오다니! 감독이야 팀과 일정 기간의 계약에 의해 임용된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구단에서는 왜 아무런 조치가 없었는지 화가 났다.

"구단에서는 몰랐겠지. 나도 뭐 상상도 안하고 있었으니까. 구단에서는 더 뛰라고 하더라고. 무슨 문제 있냐고 하면서… 내가 그냥 안 뛰겠다고 그랬어. 내년에 (홍)명보도 다시 오고, 꼭 우승 한 번 하고 싶었는데… 명보랑도 다시 한 번 뛰고 싶고…

내가 10년을 뛰었다고. 이회택, 허정무, 박성화, 최순호. 감독만 네 명을 겪었다고.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선수 쓰는 건 감독의 고유 권한이라구. 그건 절대적인 거야. 감독이 원하는 스타일에 맞지 않고, 신뢰하고 밀어 줄 수 없으면 뛰나 마나지 뭐. 지금까지 10년 동안 주전으로 잘 뛰어 왔는데… 내년에 벤치에 앉아 있으면 그렇잖어? 후배들이랑 팬들 다 보는데, 그게 뭐야? 감독 입에서 은퇴 이야기가 나왔다 이거야. 선수가 시즌 내내 백프로 잘 뛸 수도 없는데, 그럴 때 감독이 계속 믿고 내보내 주지 못할 거란 말이지. 내 입장에서는 팀을 옮기든가, 은퇴를 하든가 둘 중에 하나라구. 지금까지 포항에서 좋게 잘 뛰어 왔는데, 1-2년 다른 팀에서 더 뛴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고향도 여기고, 포항 떠나서 다른 데서 살기도 싫고, 스틸러스 참 좋아하고, 팬들도 나 좋아해 주고…" "나도 나 자신을 잘 안다고. 내가 뭐 그렇게 국가대표 스타들처럼 유명한 선수도 아니고… 그저 포항에서 사랑 많이 받고 그렇잖아? 이제 조금씩 현실이 인정되기는 하는데, 아직도 실감이 안날 때가 많아. 길에서 사람들 만나면 '내년에 꼭 우승 하입시데이~' 하고 인사하는데…"

회 한 접시를 거의 비워 갈 무렵, 박태하는 과메기를 시켰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얼렸다 풀리기를 반복하면서 반쯤 말린 꽁치를 과메기라고 하는데, 핏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생선 특유의 비린내 때문에 외지 사람들은 좀처럼 쉽게 입에 대지 못하는 포항의 토속 안주이자 겨울 특미다. 물론, 소주 안주로는 둘도 없이 딱이다. 소주 몇 잔이 돌자 능숙하게 과메기를 시키는 폼이 영락 없는 포항 사나이인 모양이다.

"소주 쫌 하네? 우린 한 번 마시면 많이 마셔. 평소에 맘대로 못 마시니까… 담배도… (마침 그가 잠시 자리를 피운 사이에 담배 한 대를 맛나게 꼬실러 버린 뒤였다.) 나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 폈다고. 프로 오면서 딱 끊었어. 집사람도 나는 담배 안 하는 줄 알어.

요즘 들어서 몇 대 피우게 되더라구. 참, 내… 10년 동안 입에도 안댔는데…"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겠지만, '성실'이란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사는 박태하에게도 그만큼 힘든 시기였는가 보다. 지난 10년간 위기와 좌절, 고민이 왜 없었겠는가만… 그 당시 그가 느꼈던 충격과 그로 인한 고민, 무상함 등의 무게가 엄청나게 컸던 모양이다. 물론 그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 댄 사람들은 알겠지만… 막상 끊었다가도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여지없이 허물어 지는 게 바로 담배다. 이미 담배에 대한 저항 따위는 허물어질 만큼 마신 상태였지만 박태하는 끝내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확고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남들이 뻔히 자기를 알아 보는 마당에 횟집에서 담배 한 대를 꼬나 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직 그의 마음속에서는 은퇴를 받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다음날 한국과 미국의 경기가 있었다. 서귀포에 있는 김도훈 선수가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다. 대표팀에 처음 발탁 됐을 때 함께 방을 쓰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매일 같이 습관적으로 새벽 운동을 하는데, 김도훈은 후배 된 입장에 혼자 잘 수도 없어서 함께 새벽 운동을 했단다. 그렇게 새벽 운동을 함께 하면서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고, 그 인연으로 운동 더 열심히 하게 됐고 지금도 잘 따르는 동생 중에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은퇴 이야기로 김도훈 선수 또한 줄곧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상무에서 만난 다른 팀의 친한 선수들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

"내가 운도 참 없었다고. 나 입대하기 전까지 프로 선수들 다 방위였잖아. 근데, 그 때 야구 선수 있잖아? (아마도 정민태 병역 사건을 말하는 듯 했다) 뭐, 병역 비리다 뭐다 해서 난리 났었다고. 그래서 현역으로, 상무 갔다고.

은성이도 상무 후배야. (대전의 최은성을 말합니다) 참 좋아하는 후밴데… 머리 부딪치고 많이 다쳤잖아. (FA컵 결승전에서의 충돌 사건) 제수씨한테 미안하고… 미안하게 됐다고 전화 했는데, 좀 그렇더라고.

나, 그 때 기절 했었어. 한 10분 누워 있었나봐. 정신 차리고 나니까… 모르겠는거야. 여기가 어딘지, 뭐 하고 있었는지… (하)석주형은 계속 물어보면서, 못 뛰겠으면 교체하라고 하고. 나도 모르게 벤치 보고 싸인 보내는 거야. 뛰겠다고… 뛸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그 생각 밖에 없어. 무조건 뛰어야 된다. 뭐, 결과적으로 뛰어서 더 나빴을 수도 있는데… 팀이 졌으니까…

그런 면에서 내가 좀 미련해. 한 번은 경기 시작하고 10분 좀 넘어서 넘어졌다고. 팔목을 다쳤는데, 일단 게임을 뛰어야 하니까… 그냥 끝까지 뛰었다고. 전후반 다 뛰고, 연장전 뛰고… 나중에 병원 가니까 골절이래. 3개월인가 나왔는데, 한 2주 쉰 다음에 기브스 하고 또 뛰었다고.

왜, 그런거 있잖아. 헝그리 정신, 깡, 뭐 그런거. 프로가 그런게 좀 있어야 되는거 아니야? 요즘 애들 보면, 좀 아프면 게임 못 뛴다고 하잖아? 그게 맞을 수도 있는데, 난 그게 아니거든. 어지간하면 뛴다고. 그게 미련한 거기도 한데… 아파도 아픈 티도 못내면서, 10년 동안… 진짜 뼈빠지게 뛰었는데 말이야… … …"

나는 이미 많이 취했고, 박태하 또한 구단과 감독에게 섭섭한 마음을 굳이 감추기에는 약간의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운동 선수와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들의 정신과 내장이 어느 수준의 알코올 면역능력을 가졌는지…)

"첫 애는 낳는 것도 못봤어. 그 때 상무에 있을 땐데, 대회가 있어서 옆에 있지도 못했지. 이번에는 쭈욱 옆에 있었는데, 이런 일이 생겨가지고… 처음에는 말도 못 꺼냈어. 근데, 막상 말 꺼내니까 여자들이 의외로 냉정하고 대담하더라고. 그냥 아쉽더라도 여기서 끝내자고 말이야.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1-2년 더 미련 가지면 뭐하고, 다른 팀에서 뛰면 뭐하냐고. 집사람 말 듣기로 했지 뭐. 나야 더 뛰고 싶지만, 생각해 보니까 집사람 말이 일리도 있고.

(고)정운이형도 전화 했었는데, 개의치 말고 뛰고 싶으면 팀 옮겨서라도 뛰라고 그러더라구. 뭐, 그 형은 팀도 몇 번 옮겨 봤으니까. 아무 문제 없더라는거야. 더 뛰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너무 포항만 고집하지 말라는거야. 뛸 수 있을 때까지 뛰라는데… 뭐, 나랑은 입장이 좀 틀리기도 하고… 그렇게는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박태하는 포항에 푹 젖어 있는 듯 했다. 그 반대였으면 좋았겠지만, 아마도 포항 스틸러스가 그를 사랑하는 것 보다 훨씬 크게 그 자신이 포항 스틸러스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박태하는 포항을 떠난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술이 더 들어가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마시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던지, 우리는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술도 좀 더 마시려면 숨어서 마셔야 된다면서…

사실 그 다음부터의 기억은 그리 명확하지가 않다. 이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편안한 자리에서 좀 더 많은 술을 마신 것은 뻔하니까… 간간이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 했던 것 같다.

"나이는 내가 많지만, 니가 사회에선 내 선배라고. 난 공만 찼어. 사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제 편하게 만나고 편하게 마시자. 축구 때문에 알게 됐지만… 이제 그냥 편하게 보자. 편하게 보자구…"

편하게… 그렇다. '편하게'라는 이 말 한 마디가 박태하에게 있어서 얼마나 멀리 있었던 말이었는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프로 무대에 뛰어 들어서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 앞만 보면서 달렸으며, '성실맨' 이라는 수식어를 뒤집어 해석해 보면 그가 얼마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가혹했다는 말인가? 그 말 속에는 선수로서의 무대를 마감하는 데에서 오는 회한, 짐을 덜어 버리는 데에서 오는 휴식, 그리고 앞으로 부딪칠 낯선 일상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는 듯 했다. 인생의 가장 젊고 왕성한 시기를 절제 속에서 보냈고, 그랬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면서 보통 사람으로 살지 못했겠지. 샐러리 맨들이 마흔이 넘은 후에야 부딪치게 될 현실을 그는 10년 앞서서 겪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더 뛰고 싶다'는 말과 '이렇게 은퇴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말을 아득하게 되뇌었던 것 같다. 분명치 못한 취중의 기억 속에서도 그 말들은 쉽게 지워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얼마간의 기간이 지난 후에 스포츠 신문의 작은 박스에 그의 은퇴 기사가 실렸다. 10년을 한결 같이 뛴 선수에게 은퇴의 길을 강요하는 현실도 안타깝기만 한데, 난무하는 월드컵 뉴스, 이천수-최태욱-차두리로 장식되는 기사, 그 못난 월드컵 조직위의 밥그릇 싸움들 틈에 박태하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기사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우리는 지금도 월드컵을 이야기하고 16강을 이야기한다.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유소년 축구에 더욱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K-리그 발전이 대표팀 발전의 근간이라고 말한다. 히딩크를 말하고 정몽준을 말하고 피버노바, 루이스 피구, 올리사데베, 죽음의 F조, 개고기, 등등… 과연 어디에 진정한 축구가 있는가? 그리고, 한국 프로 축구의 중심에서 10년간 최선을 다한 가장 모범적인 선수는 어디에 있는가? 과연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은퇴를 결정할 권리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인지, 설사 은퇴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10년간의 노력과 성과를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인지…

이제 후추의 독자들과 함께 박태하를 나누고자 한다. 그의 정중하고 성실한 매너와 노력, 업적, 정렬, 프로의식, 투혼, 그리고 팀을 아끼고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진정한 스포츠맨십. 박태하는 지난 10년간 진정한 K-리그의 주인이었으며 포항 스틸러스의 휘장이었다. 에릭 칸토나이자 칼 립켄 주니어 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척박한 K-리그는 계속되었으며 그 속에서 한국 축구가 16강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박태하!

그는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축구보다 더 진실하고 멋진 사나이였다. 하물며, 월드컵 16강을 위해 축구를 희생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축구가 아름다운 이상으로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선수는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앞날에 축복과 영광이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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