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리콜

  • 입력 2002년 1월 8일 17시 58분


작년 9월 컴팩코리아는 일부 노트북 컴퓨터의 전원공급용 어댑터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동안 팔린 140만개를 대상으로 초대형 리콜을 실시해 화제가 됐었다. 잘못이 신고된 것은 5건, 불량률이 판매량의 0.0000035%에 불과했지만 이 회사는 ‘안전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미국 본사의 철학에 따라’ 리콜을 단행했다고 한다. 화재 발생의 가능성이 지적됐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컴퓨터회사가 안전을 따지는 게 한국 기업들의 기준으로는 기이하게 여겨지는 일일지 모른다.

▷미국의 리콜시스템은 그만큼 엄격하다. 컴퓨터회사가 이 정도라면 자동차회사는 어느 정도일까. 포드는 회사 내에 리콜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잘못이 발생하면 매스컴을 통해 공개사과하고 자발적 리콜을 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제너럴모터스(GM)는 문제 차량을 끌고 가 수리해 다시 배달해 주며 소유자에게 바비큐 파티까지 열어주기도 했다. 회사 측은 소비자에 대한 감격서비스가 목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만일의 경우 발생할 엄청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예방하려는 영리한 발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 자동차 리콜의 78%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국내 자동차 제조사들은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다. 브레이크 작동이 안되고 주행 중 엔진이 멈추어도, 심지어 연료가 새어나와 불이 나고 차가 전복될 가능성이 있는 치명적 결함도 일단은 소비자 과실로 몰아붙여 본다. 그러다가 소유자의 반발이 거세지면 마지못해 리콜을 하는데 그때도 신문광고는커녕 다른 고장으로 정비소를 찾은 차량만 슬쩍 고쳐주는 경우가 많았다. 작년 한 해 현대는 11개, 기아는 8개 차종에서 리콜이 쉬지 않고 발생(건설교통부 통계)했지만 자발적 리콜은 미미했다. 소비자들을 안전실험 대상쯤으로 여기는 이들 회사의 차에 생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은 일상에서 스릴을 느끼는 방법이다.

▷파스퇴르우유의 ‘공개사과’가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늙은이가 엎드려 사과합니다’로 시작되는 8일자 신문광고는 일부 제품의 결함을 시인하고 리콜은 물론 문제된 설비의 전면 교체까지 약속했다. 광고문에 배어 있는 경영자의 강한 의지로 미뤄볼 때 앞으로 이 회사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지수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고객에게 정직한 우유회사와 그렇지 않은 자동차회사가 10년 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를 소비자들은 지금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볼 가치가 있다.

이규민 논설위원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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