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의 동인 면면을 살펴보자면, 송우혜, 김지수, 한정희 같은 문단의 중진에서부터, 은희경, 전경린, 박자경처럼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역, 그리고 조민희 홍은경 같은 앞으로의 작품 세계가 기대되는 신예급을 망라한다. 이들의 등단 연도는 1980년에서 올해에 이르기까지 20여년에 걸쳐 있고 연배 또한 최연장자인 50대의 송우혜서부터 최연소자인 20대의 조민희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다.
매달 하루 날을 잡아 수다와 험담으로 끈끈한 동지애와 음주가무와 관련된 탁월한 개인기를 과시하는 이들 연례행사로 내놓은 동인지는 한국문단에 흔치 않은 모범이란 점에서 단순한 친목서의 의미를 넘어선다. 각자 개성이 너무 강해 서로 어울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지만 서로 적당한 존경과 적절한 견제를 황금비율로 배분한 끈끈한 동지애를 과시하고 있다.
이 책에 담긴 10인10색의 스타일에서 우리 여성작가들이 삶에 대한 다채로운 시선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윤명제는 비판적 지성에 기댄 현실 비판을 수행하면서 가상 공간의 진실 문제를 파고들고 있으며, 전경린은 보다 완연한 도발적 질문과 문제 제기를 통해 그 이색의 개성을 완성해나가고 있다. 송혜근은 삶의 형식을 지시하는 여성성의 문제를 운명과 관련지어 면밀하게 파고들고 있으며, 은희경은 스러져가는 것들, 사라져버리는 것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다시금 갱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박자경씨는 특유의 정치한 문장으로 식물적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으며 김지수씨는 현대에 설화적 공간을 창조하고 대모적인 여성성을 소설적으로 실현해놓고 있다. 또한 한정희씨는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과 독특한 구성으로 슬픔에 처한 여성의 자의식을 날카롭게 벼려내고 있다. 신예작가 조민희는 자아의 세계인식과 투쟁의 과정, 즉 통과의례를 독특한 상상력의 공간 속에서 재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임의 좌장인 송우혜씨는 진중한 실증의 글쓰기를 통해 신앙과 인간의 욕망 사이의 미묘한 갈등의 세계를 포착하고 있다.
지난해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단의 막내인 홍은경은 신랄하고 풍자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소설가의 위태로운 지위와 정체성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동인지의 압권이라면 은희경 씨의 재기발랄한 필력을 엿볼 수 있는 머리말이다(아래 전문 수록). 10명 여성작가가 보여주는 밉지않은 질투심과 따스한 동지애가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 살가운 풍경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은씨가 여기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대외적으로 특별한 이름이 없는 동인들이 대내적으로 자칭하는 모임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지성과 미모와 상징적 젊음과 화려한 입심과 고통에 대한 진지함과 유머감각,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적절히 숨길 줄 아는 인격까지 겸비한 여성 소설가 모임.’
< 책머리에-소설로 남을 감탄과 고독과 망설임들 >
이 책은 우리의 여섯 번째 책이다. 그러므로 나이순으로 내려오며 쓰게 돼 있는 서문을 서열 6위인 은희경이 쓰고 있는 것이다. 내 차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아연 세월을 실감한다. 나와 전경린 씨가 공동당선된 1995년에 시작된 모임이니 벌써 7년이 흘렀다. 그때 일곱 명이었던 동인의 숫자도 1997년 박자경, 2000년 조민희, 그리고 올해 홍은경 씨의 합류로 딱 열 명이 되었다.
우리 모임의 정식 명칭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여성 당선자 모임’이다. 그러나 비공인 명칭은 ‘지성과 미모와 상징적 젊음과 화려한 입심과 고통에 대한 진지함과 유머감각,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적절히 숨길 줄 아는 인격까지 겸비한 여성 소설가 모임’쯤이 아닐까 한다. 만나면 서로의 이야기가 너무나 다채로워 화제가 꼬리를 무는데, 약 5분 간격으로 웃음이 터져나오고 약 10분 간격으로 자기 자랑과 서로에 대한 칭찬이 적절히 섞이게 마련이다. 그런 분위기의 정점에는 물론 우리의 존경과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부동의 보스 송우혜 선배가 있다.
각자의 소설을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사실 열 사람 모두 너무나 개성이 강하다. 신춘문예 당선 년도만 해도 1980년부터 2001년까지 20년에 걸쳐져 있으며, 50대에서 20대까지 나이 분포도 다양하다. 보통의 경우라면 관심사와 고민을 공유하고 또 그것에 대해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기에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마냥 즐겁다. 우리 중에는 활달한 사람도 있고 조용한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제 속에 세상을 향해 할 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쉽게 의기투합한다. 따뜻한 사람과 냉소적인 사람, 그 둘의 공통점은 인생에 대해 진지하다는 것임을 나는 이 모임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 중에는 저녁 모임을 꺼려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도 있고, 역사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 ‘멋진 남자는 죄다 죽은 사람들 중에 있다’고 애석해하는 50대 독신도 있지만 그 입장 차가 농담의 파장을 크게 만들어줄 뿐이다.
모두들 말하는 방식도 사뭇 다르다. 흥미로운 일은 각자의 말하는 방식이 자신이 쓴 소설 서술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송우혜 선배는 철저한 기승전결 아래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서 반복적으로 자세히 말하지만 한번도 자신이 처음 의도한 갈 길을 잃은 적이 없다. 윤명제 선배가 약간 무겁고 시니컬한 논평형이라면 한정희 선배는 늘 웃음이 반인 애교스러운 어투로 돌려 말하는 여유가 있다. 송혜근 선배는 낭만적 아름다움을 지닌 스타일리스트이고 전경린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도발적 매력을 내뿜으며, 조민희 씨는 영민하고 홍은경 씨는 조용하지만 힘이 있다. 늘 흐트러지지 않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김지수 선배, 그리고 반항적이고 대담한가 하면 한편 섬세하고 따뜻한 박자경 씨. 그 가운데에서 은희경도 좀 끼어보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이 모임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의례적 성격이 없지 않았다. 송우혜 선배가 표현하듯 ‘기관차 같은 김지수’ 선배의 추진력에 의해 모임이 만들어졌지만, 같은 지면으로 등단했다는 것만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결속력을 갖기에는 우리 모두 복잡한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서로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고 말이 통하게 되고, 무엇보다 각자 만만찮은 사람이란 걸 알아보면서부터 우리의 정분은 꽤 깊어진 듯하다. 새 책이 나오면 맨 먼저 사인본을 나눠 갖고(처음에는 서로의 인세수입을 돕는 의미에서 공동회비로 책을 구입해 몇 권씩 나눠갖기도 했다), 축하의 밥을 먹는 자리에서 선물도 증정한다(사람에 따라서 누구는 스웨터를 받지만 누구는 양주를 받기도 한다). 또한 상을 받으면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시상식장의 맨 앞줄을 점유해 주며 뒤풀이 자리에서 한상을 차지하고 여지없이 분위기를 띄워주는 것도 우리 동인들이다. 개인적 기쁨도 함께 나눈다. 아들을 서울대학에 보냈다거나 브리지 게임에서 이겼다거나 외국생활을 청산했다는 이유로 밥이나 차를 사곤 한다. 지난 여름 상을 당했던 은희경은 새벽같이 차를 몰고 전라도까지 찾아와준 동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는 증언을 보내왔다.
한 달에 한 번 정도인 우리의 모임에는 가끔 자리를 빛내주기 위한 손님들이 함께한다. 우리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이니만큼 주로 동아일보 문화부에서 우리 모임과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다. 그 동안 우리 모임에 관심을 가져주신 김충식 논설위원, 홍찬식 부장, 오명철 차장께 감사드린다. 올해에는 한정희 선배의 주선으로 《현대문학》의 양숙진 주간이 와주셨고, 조민희 씨가 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고 있는 황인뢰 감독과의 만남도 즐거운 자리였다. 생각의나무 박광성 사장은 어느 모로 보나 우리 모임의 강력한 후원자이다. 출판사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동인 작품집을 3년째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지면을 빌려 이분들께 반가움과 고마움을 전하거니와, 우리가 지나치게 발랄하고 황당하고 재미있어서 분명 당황하셨을 것이므로 아울러 사과도 청하고 싶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탐문의 자세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올해의 가장 즐거운 일이라면 역시 여행이다. 작년에 나온 동인 작품집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의 인세로 함께 중국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소형버스를 빌려 타고 다른 관광객 없이 우리 일행만 돌아다녔기 때문에 매일같이 화려하고 재치 있는 입담이 차 안을 달구고 식히기를 반복했다. ‘장이모 감독은 여배우 공리를 축하려고(키우려고) 본처를 버렸습니다’라는 연변 교포의 안내를 듣자마자 ‘축하다’라는 말을 배워버린 우리는 서로를 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의 발을 밟으면 그 여자는 반드시 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가야 한다는 한 소수민족의 풍습에 대해 들은 날, 우리는 거리에서 만난 외팔이 거지에게 하마터면 발을 밟힐 뻔했다고 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웃다 지친 안내인이 종내에는 안내를 하지 않고 우리에게 어서 말씀들 좀 하시라고 기대에 찬 재촉을 할 정도였다. 나쁜 날씨에 배를 타고 안개 많은 곳을 지날 때에도 우리의 농담은 그칠 줄 몰랐다. 만약 사고가 나서 소설가 여덟 명이 모두 실종되면 개인사정으로 함께 오지 못한 김지수 선배가 매스컴을 탈 텐데, 다른 건 몰라도 혼자 스타가 되는 건 배가 아파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한사코 살아남는 길밖에 없다고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여행 첫날 밤 은희경은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식당에서 남겨온 중국술 반 병과 맥주 두 병으로 여덟 명이 밤을 새우려고 하다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술이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술만 갖고도 유쾌하고 방만한 취중방담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어쨌든 은희경은 취한 채로 잠들었다(송우혜 선배가 ‘술맛을 안다’고 하는 은희경을 빼고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없다. 송우혜 선배는 술이 아까워서 잘 안 마신다. 왜 아깝냐 하면, 아무리 마셔도 마신 것 같지가 않기 때문에 술에게 미안하고 술값에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다리를 건너며 우리는 입을 모아 ‘우리 동인지가 잘 되기를!’ 해놓고, 다리 끝에 도착한 다음에는 ‘속으로는 다들 자기 책이 잘 되기를 하고 빌었지?’라며 폭소했다. ‘아아, 저 봉우리들. 지난밤 꿈처럼 어색하고 두려워요’라고 하던 전경린 씨의 아름다운 탄식, 그리고 두 번째 밤이던가 한창 심각해졌던 페미니즘 논쟁도 기억에 남는다. 그 논쟁은 한 선배가 지 스팟을 쥬스 폿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역시 웃음으로 끝났다. 우리는 비가 뿌리는 이강의 풍광 속에서 순간적으로 슬픔의 극점과 허무를 목도하기도 했으며, 봅슬레이 카를 타고 산을 내려오며 ‘안전거리 유지’ 대신 ‘보지차거(保持車距)’라는 팻말을 본 뒤 말(語)의 주소와 유희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는 목공가게에 걸린 나무 새장에 마음이 끌려 갑자기 차를 세우고는 엉뚱하게 만두 찜통을 사기도 했다. 작가다운 진지한 표정으로 대형서점을 시찰한 뒤에는 슬픈 눈의 소수민족 소녀가 담긴 중국 화집과 청묵과 중국 그림책들을 샀다. 하나같이 물건값을 속이면서도 기가 질리도록 끈질기게 따라붙는 중국 사람들에 대해서도 각기 견해가 달라, 누구는 삶의 보편적 연민을 느끼는가 하면 누구는 그들 속에 계속되는 사회주의를 엿보았다. 중국인만의 또 하나의 대국적 오만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조금씩 각자의 머릿속에 서로의 생각을 들여놓을 자리를 내주면서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계림과 서안의 거리 곳곳에 떨구어놓은 우리의 웃음소리, 언젠가 우리 소설의 한 조각으로 남을 감탄과 고독과 망설임들, 지금도 잘 있는지.
그렇다면 올해의 가장 중요한 일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책 출간 소식이다. 올해에는 네 권의 책이 나왔다. 송혜근 선배의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는 독특한 여성적 미적 감수성으로 삶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인상적으로 포착해 주목을 받았다. 또 은희경의 『마이너 리그』가 화제 속에(라고 해두자) 출간되었고, 전경린 씨는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를 펴내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서의 자기기록을 다시 한번 갱신했다. 조민희 씨의 『론리하트』 또한 신예답지 않은 탄탄하고 정연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어 호평이 이어졌다. 김지수 선배의 『문명왕후 김문희』는 사료와 설화 사이의 빈 곳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채워 풍요로운 여성성의 개화를 이루었다는 높은 평을 받았다.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중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론리하트』가 생각의나무에서 출판되었으니 박광성 사장과 보통 인연이 아닌 셈이다. 이번 동인지 『고양이는 부르지 않을 때 온다』를 만드느라 애쓰신 김도언 씨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새해의 덕담 한 마디. 2002년에는 모두가 대표작을 쓰게 되기를!
안 되면 말고. 2003년에 쓰지 뭐. 어쨌든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쓰고 있을 테니 말이다.
2001년 12월 은희경
<윤정훈 기자>digan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