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눈]안경환/누굴 위한 개헌 타령인가

  • 입력 2002년 1월 13일 18시 07분


헌법은 한 나라 국민의 역사적 성과를 담은 문서다. 헌법의 눈은 곧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국민의 눈이기도 하다. 그 문서를 통해 역사의 영욕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거울이다.

헌정사는 바른 사회를 만들려는 국민이 명시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나섰던 치열한 투쟁사가 되어야만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헌법 제1조가 선언한 장엄한 역사의 기록이다. 1948년, 신생공화국의 출생신고서로 제정된 이래 아홉 차례의 개정을 견뎌낸 우리 헌법의 얼굴이요, 심장이다. 민주공화국이란 문자 그대로 나라의 주인이 국민인 정치체제를 말한다.

‘제Ⅹ공화국.’ 한동안 민주공화국 앞에 서수가 붙었던 연유는 어느 외국 학자가 명명한 대로 소용돌이의 현대사 때문이었다. 민주공화국, 그 공화국의 상머슴이 바뀔 때마다 접두수를 덧붙여야 했던 치욕의 헌정사를 시인 황지우는 ‘변태성욕자에게 아홉 차례나 유린당한 가련한 여인의 일생’으로 표현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헌 이래 대한민국은 하나의 공화국일 뿐이다. 국민의 권력을 찬탈한 독재자와 국민을 기만한 정치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정략적 이해 때문에 헌법을 유린했다. 그리고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참칭하면서 숫자놀음을 벌였던 것이다.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법학자 박홍규가 토한 섬뜩한 고발대로라면 우리 헌정 반세기는 이들 ‘살헌자(殺憲者)’들이 발호한 불행의 역사였다.

새해 벽두부터 정치권 일각에서는 또다시 헌법 개정의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드디어 열 번째 변태성욕자가 등장하려는가. 벌써부터 넘쳐흐르고 있는 ‘살헌자’의 블랙리스트에 또 한 줄을 보태려는가.

헌법은 걸핏하면 바꾸는 것이 아니다. 안정된 헌정사를 가진 나라에서는 “헌법은 ‘헌’(古)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과 같은 영속적 가치를 선언하는 지고한 문서이자 이를 실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새(新)’ 법이 되어야 하는 세법과는 다르다.

물론 헌법도 바꿀 수가 있다. 그러나 헌법이 바뀌는 경우는 역사의 전환점이고 전환의 요청은 국민으로부터 제기되어야만 한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전형적으로 기본적 인권에 관한 조항과 권력구조에 관한 조항의 양대 요소로 구성된다. 양자는 주와 종,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선다. 누가 어떻게 최고 권력자가 되느냐, 최고 권력자는 얼마 동안 권좌를 누려야 하느냐 등 권력구조에 관한 규정은 그 자체로 아무런 정의를 실현해 내지 못한다. 다만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효과적으로 보장해 모두가 고르게 살맛 나는 세상을 열어 가는 방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모든 개헌 논의의 출발점은 현재의 권력구조로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없다는, 못 살겠으니 갈아보자는 국민의 표출된 의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 헌정사에서의 아홉 차례 개헌은 모두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대통령제인 경우에 선출방법과 임기, 권력구조의 변경만이 주된 쟁점이었다. 그것도 거의 모두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통치권자’니 ‘대권’이니 하는 국민권력의 찬탈자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용어는 대통령이 국민을 섬기는 상머슴이 아니라 국민 위에서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백번 양보해 권력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과연 그 문제가 세계화의 격랑 앞에 어떻게 하면 생존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해도 모자랄 시점에 정치권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설 정도의 문제인가. ‘제왕적 대통령’을 ‘제왕적 총리’로 바꾸거나, ‘제왕적 대통령’을 4년에 한 번 중간 평가의 시험대에 올리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헤쳐 가는 데 가장 시급한 현안인가.

우리에게 2002년은 더없이 귀중한 한 해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유린당했던 헌법을 명실공히 국민의 경전으로 자리잡게 할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해다. 무릇 대통령이라는 국민의 상머슴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면 실로 겸허한 마음으로 헌법전에 경배하고 온 가슴으로 되새길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안경환 서울대교수·한국헌법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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