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삶의 빛은 어둠의 끝에 '그대의 차가운 손'

  • 입력 2002년 1월 18일 17시 58분


◇ 그대의 차가운 손 / 한강 장편소설 329쪽 8500원 문학과 지성사

가위가 보를 이기고 바위가 가위를 이기며 보가 다시 바위를 이긴다. 그렇다면 ‘어둠’을 이기는 것은 무엇일까? 빛일까? 만일 그렇다면 어둠을 이긴 그 무서운 빛을 우리는 또 무엇으로 이겨야 할까? 다시 어둠이란 말인가?

틀렸다. 빛으로는 어둠을 이기지 못한다. 빛과 어둠은 서로 겨누지를 못한다. 빛 속에서 어둠이 시작되고 어둠 속에 이미 빛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암수 한몸의 빛과 어둠의 신비를, 나는 한강의 지난 소설들에서 보아왔었다. 구원의 빛에 대한 열망이 커갈수록 짐승의 어둠은 더욱 더 짙어지고 그 어둠이 극에 달했을 때 비로소 꽃의 구원이 찾아오는…. 생의 어둠을 치열하게 응시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실은 그 어둠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빛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었다.

신작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도 그녀는 또 한번 빛을 향해 온몸으로 어둠을 밀고나간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석고로 뜨는 조각가와 사춘기에 겪은 성적 학대로 폭식증과 거식증의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젊은 여성은 저마다의 질병과 기형을 앓는 영혼들이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 거짓과 의심의 껍질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껍질이 견고해져갈수록 그들의 중심은 점점 더 공허해지고 그 공허함 안에서 어둠이 발생한다. 작가가 영혼 어딘가가 부서진 이들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들이 토해내는 어둠이 다시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들을 감염시키고 그들 속에 낡은 어둠을 이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둠이 끝나는 지점에 충만한 사랑의 빛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아니, 확신 없이도 그녀는 계속 나아간다. 멈춰서거나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다.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어둠 속으로 깊이 걸어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한 상처받은 영혼에게서 흘러나오는 건조한 고백의 목소리에 홀려 우리는 그 여행길에 동참하게 된다.

예전의 작품들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바로 독자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가는 힘이라고 하겠다. 그 힘은 서사의 속도감이나 탄성에서 오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에 대한 작가의 의지와 확신으로부터 오는 힘이다. 오랜 병상을 털고 일어나는 환자의 눈에서 보는 생에 대한 그리움과 똑같은 힘이다.

2년이라는 짧지 않았던 공백의 시간 동안에 작가는 어쩌면 고독과 불안이라는 지독한 병을 앓았던 것은 아닐까? 한 차례 신열이 지나간 뒤에 밀어닥치는 배고픔과 똑같은 확신으로 그녀는 세상 밖에서의 사랑을 믿고 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이제 막 벗어나고 있는 듯한 그녀의 수척한 얼굴을 믿는 마음으로 나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조 민 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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