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대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
하나의 책이 갖는 진정한 가치는 그 책이 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전국의 명문가 15곳을 직접 찾아 다니며 각 명문가의 역사와 정신, 과거와 현재를 조명한 이 책의 가치는 명문가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솔직히 뼈대있는 집안이야기는 기분나쁜 주제이다. 그래 조상 잘 만났구나. 거기에 풍수까지 결부되면 그래 집터 잘 골랐구나. 줄줄이 출세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그래 잘났구나 그래서 무슨 좋은 일을 했느냐? 보통사람들은 명문가 얘기를 들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한편으로는 귀가 솔깃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존경심이 우러나오지 않는 무관심 더 나아가 경멸의식까지 동반하는 이중적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결코 나만의 심정만은 아닐 것이다.
왜 그러할까?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세 100년은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면서 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마치 군대 유격훈련 받는 것처럼 혹독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이 시대 우리 모두는 상처받았다. 그것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노력한 가장에서부터 국가를 경영한다는 사회지도층 모두가 그러했다. 이 시대는 진정 존경받는 어른이 없는 불행한 사회이다.
#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상류층의 필요성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이제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상류사회가 존재할수록 그 사회는 안정된 사회이고, 아울러 사회구성원 전체의 삶의 질이 올라간다.”
이러한 시각에서 저자는 수백년 동안 고택을 유지해온 명문가 집안이 과연 ‘어떻게 살았는가(How to live)’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명문가 집안의 가장 큰 공통점으로 ‘네가 살아야 나도 사는 상생의 원리’를 실천해 왔음을 찾아냈다. 그것은 유교식으로 표현하면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우리의 전통적인 믿음이요,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로마 천 년을 지탱해 준 철학 ‘노블레스 오블리제(혜택받은 자들의 책임;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가훈을 바탕으로 12대 400년 동안 계속 만석의 경제력을 유지해 온 경주 최부잣집의 경륜과 철학을 추적하고, 아울러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게 한 하나의 요소로서 그집 고택의 풍수적 조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마치 주변 산과 물이 다르듯,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전국의 15곳 명문가 이야기를 저자 특유의 쉽고도 맛깔나는 문체로 소화해 내고 있다.
그렇다. 도덕성을 갖춘 상류층의 등장은 정치사회의 안정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까지도 높여줄 것이다. 국가경쟁력은 첨단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류층의 오블레스 노블리제 의식, 그것이 참다운 삶과 문화의 질 그리고 국가경쟁력과도 직결될 것이다.
#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있게
이 책과 비슷한 책들은 예전에도 있었다. ‘종가집’ ‘고택’ ‘명가’ 등을 다룬 것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몇가지 점에서 예전 책들과 완전히 차원을 달리 한다. 먼저, 수백년 전통의 ‘고택’이라는 하드웨어에 담겨 있는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동양사상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동양사상의 주류는 유교와 불교이다. 그러나 전통문화에 배어 있는 옛사람의 정신과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유·불·선이라고 할 때의 선의 전통, 그리고 응용학문으로서의 풍수학·관상학·사주학까지 꿰고 있어야 선인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어렵고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천문·지리·인사라는 전통적인 동양의 삼재사상의 이해체계 속에서 용해하여 오늘날의 코드로 자연스럽게 되살려내고 있다. 그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정통으로 대학에서 불교와 유교를 전공했으면서도, 일찍부터 재야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기인·달사들과 교류하고 또한 지난 15년간 한·중·일 삼국의 600여개 사찰을 현장 답사해 온 저자의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다양하게 조명한들 어려운 한자말과 생경한 용어들이 남발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전통문화를 조금 깊이 있게 소개할 때마다 부딪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사건이 얽힌 일화에는 많은 한자 지명과 인명 그리고 한시가 들어가고, 다양한 개념들은 형이상학적인 철학용어들이다. 오늘날 전통문화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의미있게’ 라는 대중서의 방향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어려움을 대충 뭉개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언어로 정면돌파하고 있다. ‘천문은 타이밍’, ‘한국적 살롱문화’, ‘산과 물의 스파크’, ‘로테이션 발복’ ‘풍수는 유교적 만다라’ 등 이 책 곳곳에 배어 있는 저자특유의 현대식 표현은 자칫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는 전통적 개념들의 핵심을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명문가 이야기를 통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될 것이다.
김기덕(건국대 강사·한국사·영상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