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TK표 충청표

  • 입력 2002년 1월 18일 18시 12분


어느 입담 좋은 독설가의 표현대로라면 나라 안에 웬 놈의 문(게이트)이 그리 많은지 문이 하나 열릴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부정부패 독직비리로 대통령조차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라지만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볼 게 있다. 선거의 해라는 올해 벽두부터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는 지역감정 부추기기가 그것이다.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만질수록 커지는 혹같은 것이어서 지역감정을 부추기지 말라고 해봐야 오히려 지역감정을 도지게 한다지만 그냥 두고 본다고 없어질 혹이 아닌 만큼 커지는 걸 염려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아니, 이미 커질 대로 커져서 이것을 떼어내지 않고는 제대로 운신도 못하게 된 것이 오늘의 나라꼴이다.

▼‘JP 땅’ ‘TK 몫’ 이라니▼

김종필(金鍾泌·JP) 자민련 총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즉시 거국내각을 구성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 2004년 4월 총선 직후 내각제 총리와 국회에서 선출된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기고 자신은 물러나겠다는 ‘2년짜리 대통령’을 하겠다는 것인데, 워낙 ‘어제의 논리와 오늘의 논리’가 오락가락하던 터여서 긴가민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심판은 유권자인 국민이 내릴 일이니 미리 가타부타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내각제를 해야 한다면서도 정작 ‘충청도는 JP 땅’이라며 지역감정 부추기기에 열심이니 내각제가 나라 살 길이란 것인지, JP 살 길이라는 것인지 그 속내가 아리송하다. “지난 총선에서 영남과 호남은 다른 지역에 한 석도 안줬으나 충청도만 마음이 좋아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나눠주다 보니 분열됐다. 또 그럴 것이냐?” “아니요”(합창)라니 명색이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와 원내 제3당이라는 정당 사람들이 주고받기엔 아무래도 질이 떨어지는 문답이다.

한나라당의 몇몇 인사들도 이에 못지 않다. 이들은 ‘TK 구심점론’이라는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논(論)’을 내놓았는데 기실 그 알맹이란 논하고 말고 할 수준이 못된다. “TK가 자기 몫을 찾으려면 뭉쳐야 한다. 대권 당권이 분리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TK표를 줄 수 없다.”(김만제 의원) “막연하게 이회창(李會昌) 총재를 지지하기보다 TK 철학과 구심점을 갖고 밀어주자. 그래야 우리 몫도 챙기고 선거운동하는 데도 효율적이다.”(강재섭 부총재)

김 의원은 TK표를 벌써 몽땅 예매라도 해놓은 듯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표를 주고 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TK 지역의 전반적인 반(反)DJ정서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해도 이는 그 지역 유권자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강 부총재는 ‘TK 철학’ 운운하지만 그 역시 까놓고 보면 TK표를 담보로 권력지분을 챙기자는 것이다. 민주국가의 권력은 잡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이란 교과서적인 얘기는 해봐야 귀에 들리지도 않을 테니 그만두기로 하자. 하지만 ‘우리 몫’이라니, 해도 너무 한 소리다.

지역감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찍이 영남의 지역주의를 ‘패권적 지역주의’, 호남의 그것을 ‘방어적 저항적 지역주의’라고 규정했다.37년간 그 지역 출신이 집권한 영남에서는 권력은 으레 자기 지역 몫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이 강한 호남에서는 수세적 입장에서 뭉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역사적 의미는 이 오랜 틀을 허무는 탕평(蕩平)으로 국민통합의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남북 관계 진전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나타났다.

▼3김 시대는 가고 있는데▼

조급한 인사편중 시정은 또 다른 인사편중을 낳았고 그것은 ‘끼리끼리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대통령까지 정신을 못차리게 한 온갖 ‘게이트 의혹’은 바로 그 온상에서 자라났고 ‘너희끼리 다 해먹어라’라는 분노와 냉소의 기운이 세상에 가득하다. ‘너희’란 사실 한줌밖에 안된다. 그러나 논리 아닌 감정은 이를 전체로 부풀리고 지역주의의 완강한 벽을 더욱 높게 쌓아올린다. 그 벽을 두고는 국민통합도, 사회의 질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릇된 지역주의가 이토록 국민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부패의 늪 속으로 몰아넣는 것을 뻔히 두 눈으로 보면서도 이를 앞장서 막아야 할 정치인들이 다시 ‘TK표 충청표’하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으니 실로 개탄스럽다. 이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3김 시대는 가고 있다. 3김 시대의 종언(終焉)과 더불어 고질병인 지역주의도 사라져야 한다. 네탓만 할 일은 아니다. 모두가 ‘지역주의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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