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의 황제 이주일(본명 정주일).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1979년,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로 2주일만에 인기를 얻은 후 20년이 넘도록 정상의 자리를 지켰지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무대 인생의 철칙이었습니다. 단 10초도 주어지지 않던 무명 시절에도 준비하고 또 준비했어요. 이리 상처받고 저리 떠돌아도 결코 꿈을 포기하진 않았답니다.
#웃음과 함께한 40년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반백의 수염과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띕니다. 뒷짐 지고 물러나 허허롭게 웃으며 원로 대접을 받을 만큼 세월이 흘렀네요. 전혀 다른 스타일과 테크닉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후배들의 재능과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박장대소 뒤로 흐르는 땀과 눈물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 역시 밤잠을 설쳐가며 아이디어를 짜내고 연습을 반복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웃기지 못하면 사라지고 마는 이 세계의 경쟁은 대한민국 그 어느 집단보다 치열합니다.
그는 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더 많은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했지요. 이제야 앞니 빠진 촌 늙은이의 따뜻한 웃음과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의 맑은 미소를 연결짓는 법을 터득했으니까요.
웃음주머니에 인생살이의 고단함과 힘겨움, 눈물과 한숨을 넣어, 이주일만의 풍자와 해학을, 적어도 10년 아니 20년은 더 펼치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체력도 뒷받침된다고 믿었지요.
지난 연말에는 MBC로부터 공로상도 받았습니다. 서재를 가득 채운 트로피와 상패는 노력의 대가, 인기의 증거지요. 40년이 넘도록 무대에 섰으니 자격은 충분합니다. 코미디언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단독공연을 가졌던 1999년의 늦가을 등 몇몇 멋진 장면을 수상의 근거로 내세울 수도 있겠지요. 공로상을 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혹시 그는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선배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혼자말을 뇌까리지 않았을까요. 이 끔찍한 병마가 아니었다면 과연 내게 공로상이 왔을까. 설령 방송국에서 공로상을 주겠다고 해도 물리치지 않았을까.
#담배, 낯선 내 안의 적
여기, 일산 국립암센터 어두운 병실에 한 인간이 있습니다.
폐암 환자 정주일. 푸른 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눈에 어립니다. 90분을 내리 뛰어도 지치지 않는 강한 심장과 폐를 지녔었지요. 멕시코 4강 신화의 주역 박종환 감독도 그보다 더 오래 더 빨리 달리지는 못했으니까요. 고향 후배 황영조가 오르던 몬주익의 언덕이 축구장 위로 겹칩니다. 40년을 정말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의료용 산소통과 한 움큼의 약이 갑자기 그를 멈춰 세웁니다. 죽음, 그 낯선 존재와의 정면대결을 강요합니다.
삶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느낀 적이 있긴 합니다. 1991년, 그는 아들을 먼저 보낸 죄인이 되었지요. 어느 소설가의 절규처럼, ‘한 말씀만 하소서’, 신을 원망했을 겁니다.
과연 나는 이 슬픔에서 벗어나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펭귄 춤을 추고 바보 흉내를 낼 수 있을까. 그때 그는 비탄에 잠긴 아버지의 입장이 아니라 아버지의 코미디를 좋아하며 자란 아들의 선한 눈망울을 살폈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계실 곳은 이 슬픔의 골방이 아니라 저 기쁨의 무대입니다. 그는 아들의 뜻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월암 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을 재개했었습니다.
#갈채대신 가족 품으로
MBC와의 인터뷰에서도 공개적으로 밝혔듯이, 그는 병이 든 후 24시간을 내내 늙은 아내와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세월의 무게를 함께 이고 온 아내가 정말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다는군요. 환호와 박수갈채가 사라진 자리, 홀로 아파하는 그를 따뜻하게 보듬는 가족이란 존재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자신을 덮친 병마를 불운이나 불행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원인을 철저하게 따지고 분석한 후 내 안의 적(敵)을 몰아내자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던 담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죠. 일찍이 소설가 최인훈은 ‘회색인’에서 “생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맘만 먹으면… 맘먹는다는 게 좀 대단한 일이지만”이라고 적었습니다. 담배, 그것을 끊는 것은,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허나 그 마음을 먹지 못해 해마다 만오천 명이 암에 걸려 인생의 무대에서 비참하게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여기, 목청 높여 금연을 주장하는 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는 권합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일상을 둘러보라고. 훗날 눈덩이처럼 불어나 자신을 삼켜버릴 사소한 습관을 바꾸라고. 그것은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폐암환자 정주일을 넘어, 먼저 깨달은 견자(見者)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기꺼이 그 충고를 따르겠습니다.
김탁환 <소설가·건양대교수> tagta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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