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1시 SK증권 서울 명동지점. 주가가 16포인트 이상 올랐지만 객장은 조용하기만 하다. 10여명의 증권사 직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고객이라고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5명이 전부. 객장에는 개인용컴퓨터(PC) 4대만 놓여 있고 시세판도 없다.
“객장에 시세판이 없으니까 영 재미가 없어. 객장이 장터같던 옛날이 그리워….”(김영일·63·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바로 옆 건물 3층 리젠트증권 명동지점. 객장은 쾌적하게 꾸며져 있지만 역시 투자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박주현 지점장은 최근 본사에 사무실 규모를 줄이자고 건의, 승낙을 얻었다. “고객이 찾아오질 않는데 대형 객장을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증권사 객장의 풍경 변화는 인터넷 주식투자가 몰고 왔다. 증권사로서는 사이버 투자에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증권업계의 구조조정까지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온라인거래 대국(大國) ‘코리아’〓98년 인터넷 주식거래가 처음 도입됐을 때 전체 주식매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에 불과했다. 그러나 99년 25.4%, 2000년 55.9%로 성장하더니 작년 10월에는 70%에 육박했다. 특히 개인투자자의 주식거래는 95%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진다. 온라인 거래에는 인터넷, 전화 자동응답시스템(ARS), 이동단말기를 통한 거래가 모두 포함되지만 요즘은 인터넷 거래가 대부분.
인터넷 주식거래가 가장 먼저 도입된 미국도 온라인 거래비중이 30%선에서 정체돼 있다. 프랑스(28%), 대만(4.5%), 일본(1.8%)과 비교해도 한국증시의 사이버거래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다.
온라인 거래 급증은 신설 증권사가 주도한 수수료인하 경쟁과 맞물려 일어났다. 현재 온라인 수수료는 거래액의 0.1% 이하. 키움닷컴 세종증권 등 온라인전문 증권사의 수수료는 0.02%까지 떨어졌다. 오프라인은 평균 0.45%에 달한다.
▽데이 트레이더, 엄청 많아〓SK증권 명동지점 김종민 차장은 “고객을 앉아서 맞던 시대는 끝났다”고 한숨짓는다. 각 직장에 근거리통신망(LAN)이 설치되던 99년부터 넥타이부대의 발길이 끊어졌고, 각 가정에 초고속통신망이 깔리면서 작년부터 주부 투자자들도 객장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이버거래가 활성화될수록 증권사 직원들은 죽을 맛이다. 회사와 직원이 나눠 갖던 고객의 거래수수료가 줄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증권사는 이미 수수료 성과급을 대폭 줄였다. 단골 고객이 없는 직원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수수료 수입도 채우기 힘들다. 동양증권 김모 과장(37)은 “증권사 경력 10년에 담당 고객이 5명에 불과하다”며 “인터넷에 온갖 정보가 다 뜨는데 비싼 수수료 물어가며 증권사에 주식을 맡길 고객이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수수료가 내려가면서 거래는 활발해졌다. 주식회전율은 376%로 미국(80%)보다 4배 이상 높다. 한 주식의 주인이 1년에 4차례 가까이 바뀌는 셈. 유동성이 없는 대주주 지분을 제외한 국내 주식투자자의 매매회전율은 710%에 이른다. 외국증권사 국내지점의 매매회전율(110%)에 비해 7배 가량 높다.
▽증권사에 위기 올까〓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오프라인 수수료(평균 1%)가 온라인 거래 수수료(0.3%)보다 3배 이상 비싸다. 그래도 고객이 오프라인 거래를 선호하는 것은 간접투자 및 고객자산을 증권사가 통합 관리해주는 랩어카운트 상품이 발달해 있기 때문. 증권사 직원은 고객이 인터넷에서 얻을 수 없는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개인투자자들은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 증권사에 맡기는 쪽이 낫다고 믿는다.
한국의 증권사는 현재 ‘수수료 따먹기’ 경쟁에 목숨을 걸고 있다. 투기적 거래를 부추겨야 수입이 오르는 상황. 97년 4100만주 수준이던 거래소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작년 4억7200만주로 10배 이상 늘었다. 97년 하루 평균 거래량이 16만주에 불과하던 코스닥은 작년에는 3억8300만주로 늘었다.
진영욱 한화증권 사장은 “지금까지는 수수료를 인하해도 주식거래량이 늘어 큰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거래가 정체되면 증권사에 심각한 위기상황이 올 수 있다”면서 “문을 닫는 증권사가 나오거나 증권사간의 인수합병이 거세게 불어닥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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