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올해 가을 미국으로 1년간 연수를 추진할 예정이다. 그와 16일 오후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늦은 점심을 함께 했다. 연수 준비 때문에 토플 학원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그는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나 “조금 늦었죠?”라며 첫 인사를 건넸다.
영어 공부는 잘 되냐고 묻자 그는 쑥스러운 듯 남자처럼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성격은 무척 시원시원하고 수더분하다는 게 주변의 평가.
“공부를 손 놓은지 워낙 오래돼 도무지 진도를 못 따라가겠어요. 명색이 국제부 기자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아직 학교를 정하지 못했는데 이래가지고 좋은 학교는 어림없을 것 같은데요.”
그는 91년 앵커전문기자로 입사해 지금까지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등을 거쳤다. 지금은 국제부 소속.
“8년전 수습을 떼자마자 앵커로 투입된다는 말을 듣고 덜컥 겁이 났어요. 그래서 윗분들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해 3년간 기자로 열심히 일했죠. 그리고 나서 조금 자신감이 생겨 94년부터 앵커를 맡아 지금까지 왔네요.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죠 뭐.”
그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1학년이던 88년에 과친구들과 함께 학교선배인 MBC 정혜정 아나운서를 만나러 갔을 때만 해도 자신이 뉴스 앵커가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정선배는 제 눈에 ‘선녀’처럼 보였어요. 그때 저는 치아에 교정틀을 하고 두꺼운 안경에 긴 파마머리를 했으니 얼마나 촌스러웠겠어요. 그런 제가 SBS 뉴스 앵커가 되다니…. 그래서 전 여성앵커 지망생들에게 희망이고 싶어요.(웃음)”
한수진이 면접 시험때 ‘촌티’를 드러낸 일화.
“면접 시험에 보라색 펄(반짝이) 아이섀도우를 바르고 촘촘한 바둑판 무늬 정장을 입고 갔어요. 펄이 든 화장품이나 바둑판 무늬 의상은 화면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뉴스하는 이들은 반드시 피하는데도 몰랐던거지요.”
그는 그 이후에도 8년간 매번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의 ‘장기 집권’은 여성 앵커가 남성 앵커의 보조 역할을 한다는 고정관념도 깨트렸다.
“별탈없이 버틸 수 있었던 건 ‘8할’이 주변의 도움 덕분이에요. 제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이끌어 주신 분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변’에는 남편인 조선일보 경제부 장원준기자와 시부모님인 장덕진 홍은표씨도 물론 포함돼 있을 것이다.
매년 여대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커리어 우먼 1위로 손꼽혔고 모 언론사 회장이 “저렇게 똑똑하고 화통한 아이는 처음 봤다”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매력은 ‘인기인’에게서 좀처럼 엿볼 수 없는 소탈함과 겸손함이다. 시청자들도 TV 화면을 통해 그의 매력을 감지했을까.
그는 “떠나는 사람말고 새로 올 사람을 인터뷰해달라”며 “나는 그저 조용히 물러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찔했던 순간들▽
#1.날씨, 스포츠담당 기자 2명이 공동으로 뉴스를 진행하던 때였다. 스포츠 기자가 뉴스를 전한 뒤 날씨를 알아볼 차례였다. 그런데 맹 앵커는 날 보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 이제 스포츠 소식을 알아볼 차례죠?”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풋’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손으로 입을 가린채 혀를 깨물었다. 뉴스가 끝난 뒤 나는 시말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2.가정용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해 일가족이 부상당한 사건을 보도할 때였다. 5명 중 2명이 질식사하고 3명이 중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중이었다. 그런데 보도 내용을 꼼꼼히 챙기지 못한 나는 얼핏 ‘5명’과 ‘질식사’라는 단어만 보고 ‘5명 전원이 질식사’했다고 말해버렸다. 황급히 취재 기자가 달려왔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나는 겸연쩍게 세명의 안부를 물을 수 밖에 없었다.
#3. 뉴스 단신을 보도할 순서였다. 분명히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원고가 없었다. 단신은 프롬프터(진행자 앞 모니터에 뉴스 원고를 큰 글씨로 띄워주는 것) 처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면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뉴스가 나가는 틈을 타 급히 “원고가 없는데요”라고 말했다. 그 이후 내게 원고를 챙겨주는 사원이 따로 생겼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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