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정부 조급증이 협상 망쳤다

  • 입력 2002년 1월 27일 18시 28분


미국과 월맹이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정전협상을 할 때의 일이다. 월맹은 계속 협상을 기피했다. 그러다가 미국 측으로서는 가시적인 외교성과가 당장 아쉬운 대통령 선거 직전에야 월맹은 협상장에 나타났다. 미 대표단은 파리 중심부의 리츠호텔에 묵으며 일주일 단위로 방값을 치렀다. 반면 월맹 측은 파리 외곽에 있는 단독주택을 2년 반의 계약기간으로 세 얻어놓고는 느긋하게 협상에 임했다.

협상결과는? 물론 월맹의 완승이었다.

뉴욕타임스 선정 30주 연속 베스트셀러의 기록을 세웠다는 ‘협상의 법칙’(허브 코헨 저)에 나오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협상에서 ‘시간과 여유’가 얼마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잘 진행되는 듯 보였던 현대투신 매각협상이 AIG의 매수포기 선언으로 막판에 결렬됐다. 1년 이상 진행돼온 협상이 무산됨으로써 “현대투신 등 구조조정 기업의 처리를 끝내 신뢰를 높이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은 ‘시장’은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협상이 깨진 것은 AIG가 막판에 억지를 부렸기 때문. AIG는 ‘향후 우발채무가 발생할 경우 한국정부가 100% 책임져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해왔다. AIG는 그 전에도 합의된 가격에서 더 깎자느니, 우선주가 아니라 보통주로 달라느니 하는 추가요구를 매번 제기하고 또 관철해왔다.

존 퓨리트는 “협상이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개체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공동으로 내리는 의사결정”(협상론)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현대투신 매각협상을 지켜보노라면 ‘공동으로 내리는’ 의사결정의 과정이 과연 있었는지 몹시 헷갈린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AIG가 억지주장을 남발한 것은 상당부분 우리 정부의 자업자득이다. 많은 경우 협상은 협상사실 자체가 비밀에 부쳐지며 타결 발표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다. 그래서 ‘협상이란 도입, 전개, 절정은 없고 대단원만 있는 기묘한 이야기’라는 우스개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은 설익은 협상을 놓고 툭하면 “거의 타결” “곧 타결” 등의 경솔한 발언을 일삼았다. 이는 구조조정의 성과를 과시하고 싶어한 조급함 때문이었다는 것이 많은 관계자들의 지적. 만약 금감위가 목을 매는 듯한 태도를 내보이지 않았다면 AIG가 그리 오만하게 억지를 부릴 수 있었을까?

이번에도 협상이 깨지자마자 금감위는 즉시 “다른 원매자들이 있으므로 협상은 곧바로 재개될 것”이라며 성급한 낙관론을 발표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문제.

우리 협상팀의 강박관념은 지적돼야 한다. 그러나 ‘협상 실패’만을 이유로 협상팀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들까지 협상 조기타결에만 매달리는 조급증을 보일 경우 향후 협상에서 우리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구조조정의 원칙도 훼손될 수 있다.

이번 협상은 몇 가지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1. 부실기업은 협상테이블에서 항상 약자다.

2. 약자는 ‘공동으로 내리는 의사결정’에 제 몫의 발언권을 가지고 참가할 수 없다.

3. 약자가 여유마저 잃으면 결과는 더욱 참담해진다.

4. 이런 억울함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내실을 다지는 수밖에 없다.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