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손호철/한탄 절로 나오는 DJ인사

  • 입력 2002년 1월 29일 18시 57분


요즈음 정국을 바라보면, 두더지 잡기 게임이 생각난다. 여러 구멍 중 한 구멍에서 두더지가 튀어나오면 이를 두드리는 이 게임처럼, 누적된 각종 비리 중 한 사건이 걷잡을 수 없게 번져 나가 망연자실해 있노라면 또 다른 구멍에서 다른 ‘게이트’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해 국민의 혼쭐을 빼놓고 있다.

이 같은 비리 게이트에 따른 국정마비를 벗어가기 위한 개각이 단행됐다. 그러나 8개 부처장관과 대통령 비서진용을 대폭 경질한 이번 개각은 졸작 중의 졸작이다. 그리고 단순한 실망감을 넘어서 김대중 대통령이 인사문제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역시 오랫동안 몸에 밴 스타일은 바뀌지 않는구나 하는 한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이번 개각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과정도 문제가 많다. 대통령의 고유사항인 개각에 대해 관계자들이 언급하지 않는 전례와 달리 유례 없이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공개적으로 개각을 예고했다. 한 마디로, 매일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비리 게이트를 개각예고 기사로 눌러 보자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임으로써 개각을 정치적 카드로 악용했다는 비난을 자초했다.

▼놀라운 박지원씨 재기용▼

내용은 한술 더 뜬다. 쇄신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퇴행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한심한 내용이다. 김 대통령의 임기를 마무리할 마지막 내각이기 때문에 이번만은 중립적이고 덕망 있는 사람들을 대폭 기용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쇄신 대상이 돼 온 사람을 복귀시켰고 낡은 인물들의 순환인사를 했을 뿐이다. 얼마 전 김 대통령이 공정인사를 다짐했고 연두기자회견에서 이례적으로 잘못한 인사도 있었다고 공개사과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을 다 잊은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국정에 전념하겠다는 김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정계개편 등 정치적 개입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개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우선 ‘빅 3’라는 총리, 국가정보원장, 대통령 비서실장을 보자. 이한동 총리는 지난해 DJP공조 파기와 함께 김 대통령이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고 천명했을 당시 경질했어야 하는 구시대 인물이다. 신건 국정원장 역시 개인적 과오는 없지만 국정원의 난맥상을 볼 때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라도 교체했어야 옳다.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전윤철 기획예산처 장관은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옳은 선택이 아니다.

이번 인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박지원 정책특보의 컴백이다. 그에 대한 김 대통령의 신임은 잘 알지만, 이 시점에서 쇄신 대상으로 비판을 받아 왔고 아직도 각종 비리 게이트에 대한 연루 의혹이 가시지 않은 사람을 다시 등용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청와대는 그동안 없앴던 장관급 정치특보를 다시 만들어 박지원 특보를, 김진표 재경부 차관을 정책특보로 임명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가 박 특보가 정책특보이고 김진표 차관은 정책기획수석이라고 정정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업무착오에 의한 촌극이 아니라 생각이 짧아 진실을 누설했다가 여론을 의식해 바로잡은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즉, 여론 때문에 정정했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박 특보에게 맡겨질 임무는 정치특보일 것이라는 의혹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쇄신문제와 비리연루 의혹 등으로 정치적 부담이 많은 박 특보를, 그것도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최고권력기관인 청와대가 정치특보로 발표했다가 갑자기 이를 정정하는 방식으로 기용할 이유가 없다.

▼對국민 선전포고 하는건가▼

특히 주목할 것은 여러 정황이다. 그것은 민주당내에서 일고 있는 내각제 내지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매개로 한 자민련과의 합당 움직임, 개각에 맞추어 공조파기 4개월만에 뜬금 없이 전격적으로 열린 DJP회동, 자민련 출신의 이한동 총리의 유임, 별 잘못이 없고 유임을 강력하게 원했던 장재식 산업자원부 장관을 DJP 공조시절 자민련 몫으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신국환 장관으로 교체한 것 등이다. 이 같은 정황과 박 특보의 중용을 결합시키면, 김 대통령은 국정에 전념하겠다는 당초 약속과 달리 박 특보를 내세워 합당 등 자민련과의 공조를 복원해 정권 재창출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한다. 즉, ‘냄새나는 개각’을 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대 국민 선전포고이자 자충수다.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박 특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왕 특보’가 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이 모든 우려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 단순한 기우이기를 빌 따름이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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