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익위해 온갖 편법 동원▼
하물며 공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면, 사회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고전적 명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공인의 의미를 매우 중요시했으며, 그가 덕을 논할 때도 그 덕은 주로 폴리스의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공인으로서의 덕을 의미했다. 이는 동양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유가에서 덕은 상당수 군자의 덕이고, 군자는 공인의 성격을 갖는다.
그렇다면 덕이란 또한 무엇인가. 덕의 개념에 대해 수백 쪽의 논문을 쓸 수도 있겠지만 쉬우면서도 본질적인 덕의 의미는 ‘답다’는 우리말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며, 공인은 공인다워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공인을 공인답게 하는가. 그러기 위해 많은 자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두 가지 자질만 충족되면, 공인은 공인으로서의 덕을 갖출 수 있고 본분을 지키며 무리없이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첫째, 공인은 사익을 생각하거나 염두에조차 두지 말아야 한다. 공인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는 당연히 ‘나’의 사적 이익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와 사적으로 연관된 사람의 이익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나의 가족, 나의 친척, 나의 지인들, 그 지인의 지인들의 이익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공인의 본질적 의미에 연관된 것이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권력형비리’의 본질도 알고 보면 공인이 사익을 추구하는 일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공인의 사익 추구는 최악의 이기주의다. 사적 영역에서도 문제가 되는 이기주의가 공적 영역에 만연하면 말뿐인 공인들만 횡행하게 되고, 공직의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까지 아첨꾼이 득실대기 쉽다는 것을 현인들은 가르쳐 왔다. 17세기 프랑스 사상가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는 “이기주의자는 모든 아첨꾼 중에서도 최고의 아첨꾼”이라고 했다. 혹자는 이들이 서로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자명하다. 사익에 눈먼 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목적 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아첨이란 아첨은 다 한다. 자리만 차지하면 그만이고, 당연히 그 자리에서 권력을 남용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원칙적으로 공과 사를 분별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둘째, 공인은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집안에서 아버지가 자식들을 야단칠 때, 자식들이 “우리 모두 잘못했어요”라고 말해도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라고 사과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것도 없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은 아무도 구체적으로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소재는 단수로 표시되어야 한다.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 그 어느 누구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단수들이 모여서 복수의 책임이 될 수 있지만, 시작부터 우리의 책임이라는 말은 그럴 듯 할 뿐 결국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기 십상이다. 책임질 공인이 실종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공인의 책임소재 분명히 해야▼
책임의 차원에서도 사인과 공인의 차이점은 드러난다. 사적 영역에서는 ‘나의 책임’ 또는 ‘그의 책임’을 ‘우리의 책임’으로 감싸주려는 것을 미덕으로 삼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막연한 ‘우리의 책임’에서 구체적인 ‘나의 책임’을 분별해내야 한다. 그것이 공인의 자질이자 덕목이다. 이것은 공자든 아리스토텔레스든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철학의 가장 실용적인 가르침이다. 정치철학의 제1 원칙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공인과 공적 영역에 관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공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이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홍익을 위해 올바른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것 외의 다른 어느 것이 아니다.
김용석 철학자·전 로마 그레고리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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