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재수산업

  • 입력 2002년 2월 8일 18시 12분


올 대학입시도 추가 합격자 발표만 남겨 놓고 있으니 거의 마무리된 셈이다. 대학입시의 ‘예측불허’와 ‘파란만장’의 원칙은 올해도 어김없이 지켜졌다. 수능 점수 대폭락으로 입시생들을 순식간에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은 데 이어, 수능 점수가 엇비슷하게 나온 학생들이 어느 해보다 많은 탓에 수험생과 가족들은 어느 대학을 지원하느냐를 놓고 그야말로 안개 속을 헤매야 했다. 서울대가 개교 이래 처음 신입생 추가 모집에 나서고 이공계 대학들이 ‘기피 대상 1호’가 되는 등 갖가지 ‘파란’도 발생했다.

▷이렇다 보니 재수를 택한 학생들이 상당수에 달한다. 올 입시에서 재수생 수는 18만명 정도였으나 내년 입시에는 이보다 많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명 재수학원들은 시험을 통해 수강생을 선발하는데 경쟁률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재수를 위한 학원에 들어가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재수생 한 명이 재수 생활 1년 동안 1000만원의 비용을 쓸 경우 20만명이 재수를 한다면 그 시장 규모가 2조원이다. ‘학원 재벌’이라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지만 최근에는 늘어나는 재수생들로 인해 ‘재수산업’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자식을 재수시켜야 하는 학부모의 심정은 착잡하고 불안하다. 힘든 재수 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 재수를 해서 과연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는지…. 80년대만 해도 재수생들은 대학생이 많이 몰리는 거리를 일부러 피해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명문대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만끽하는 동창생들을 만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광화문통 아이들’은 70년대 유명 학원들이 몰려 있던 광화문 일대의 재수생들을 얕잡아보는 말이었다. 학부모 세대에 비해 요즘 수험생들은 재수에 대해 한결 부담감을 적게 갖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신세대들이라고 마음고생이 없을 리 없겠지만 전보다는 재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종의 세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입시 열병에 시달리는 것은 수험생 당사자만이 아니다.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부모들도 수험생 앞에서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하면서 죽은 듯 지낸다. 치솟는 사교육비는 부모로서 다른 비용을 줄이더라도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재수생을 둔 가정은 이 같은 입시 고통이 한 해 더 연장된다. ‘재수산업’이 번창할수록 학부모들의 시름은 그만큼 깊어질 수밖에 없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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