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민웅/편집권 법제화 철회하라

  • 입력 2002년 2월 14일 18시 26분


세상이 뒤집힐 징조인지 희한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른바 진보 성향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크게 위축시키고 정권 안보에 봉사할 가능성이 큰 보수적 정간법(定刊法) 개정안을 무엇이 급했는지 설 직전 국회에 제출한 것도 그 중의 하나다. 이쯤 되면 ‘진보 성향’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일반 국민은 적지 않게 헷갈릴 것이다.

심재권 의원(민주당) 등 27명의 이른바 진보 성향의 의원들이 제출했다는 정간법 개정안의 제안 이유를 보면 ‘정기간행물 발행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기간행물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을 제고하며, 독자의 권익을 보호함으로써 민주적 여론 형성과 공공복리의 증진을 도모하고, 언론의 건전한 발전을 기하기 위하여’라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정간법 5공시절로 회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개정안의 발의자와 찬성자 모두 의식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지만, 5공 정권의 ‘언론기본법’의 제정 목적과 그 논조가 아주 흡사하다. 언론기본법 제1조는 ‘이 법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보호하고 여론 형성에 관한 언론의 공적 기능을 보장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고 공공복리의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악명 높았던 언론기본법도 언론의 공적 기능을 보장한다고 말하면서도, 언론의 자유보다는 공공복리의 실현을 위한 언론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개정안을 낸 의원 가운데는 5공 정권의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이다.

개정안이 모두 엉망이라는 말은 아니다. 신문의 공적 책임을 선언적이지만 잘 정리하고 있는 점(안 4조), 다소 문제는 있지만 언론 보도의 피해 구제를 용이하게 하려고 노력한 점(안 25조 45조), 정기간행물 사업자 등 용어의 정의를 구체화한 점(안 2조) 등 부분적으로 전향적인 조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문사 편집위원회를 법률로 강제한 점, 신문 경영 내용의 문화관광부 ‘신고’를 의무화한 점, 신문 구독 시장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무가지 배포를 일절 금지하고 있는 점, 33% 이상의 신문사 주식 지분 소유자의 타 신문 및 통신 주식 취득 지분을 제한한 점 등은 독소 조항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편집권의 독립을 법률로 보장하겠다는 개정안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대한 함의가 있다. 하나는 정부가 법 집행을 감독하는 권한을 갖게 되기 때문에 결국 정부 측에 언론의 편집권에 어떤 형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을 법적으로 열어주게 된다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약 정부가 편집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과 관련해 특정 신문사의 법률 위반을 법원에 고발한다면 법원이 신문사의 편집 권리의 범위를 판단해주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법원이 최종적인 편집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바로 이런 이유들로 해서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우리보다 훨씬 먼저 편집권 독립 문제를 고민해온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 가운데 신문의 편집권 문제를 법률로 해결하려고 시도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 이런 기발한 발상이 나왔는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첨단 정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다채널, 다매체, 복합매체의 시대가 전개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동종 미디어 간의 수평적 통합, 이종 미디어 간의 수직적 통합, 미디어 산업과 다른 산업 간의 복합기업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비추어 타 신문 통신의 취득 지분을 제약한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외국의 초국가적 미디어 기업들이 우리의 미디어시장을 노리고 자국 정부를 앞세워 시장 개방 압력을 가하고 있는 시점임을 감안할 때, 지분 제한이 우리의 문화 주권과 국가 이익을 지키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인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에 언론 간섭권 주는 꼴▼

마지막으로 ‘공보처’시절처럼 신문사 경영 내용을 공연히 문화관광부에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특정 신문사의 경영상 강·약점을 정부가 면경(面鏡)처럼 알아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발의자들의 면면을 볼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가 부수 공개도 ABC제도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이 훨씬 더 적절하다고 본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정제(精製)되지 못한 개정안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언론 개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자진 철회를 권고한다.

이민웅 한양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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