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외교적 관례를 감안한다면 서울에 온 부시가 DJ의 체면을 손상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DJ와 부시는 전통적인 한미 동맹관계를 재확인하는 한편 평양의 김정일에게 대화의 문이 여전히 열려있다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부시가 DJ의 체면을 세워준다고 해서 DJ의 속까지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 대사가 이미 못박았듯이 부시가 김정일의 체면까지 세워줄 리가 만무한 이상 DJ가 지난 4년간 공들여온 햇볕정책은 심각한 타격에 직면하게 됐다. DJ-부시 정상회담 후 합의문 발표마저 없다면 부시가 사실상 DJ의 햇볕정책에서 등을 돌렸다는 유추해석마저 가능케 한다. 이것이 2002년 2월 한미 공조의 현실이다.
이 엄연한 현실은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김근태(金槿泰) 민주당 상임고문은 2월5일 집권당 대표 자격으로 한 국회 연설에서 미국에 햇볕정책을 흔들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국민의 노력으로 민주화가 이뤄질 만하면 안정을 중시한다면서 독재세력의 손을 들어줬던 아픈 기억을 잊을 수 없다”며 미국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집권여당 측이 이처럼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은 유례없는 일인데 이에 대해 허버드 대사는 이렇게 답했다.
“미국은 독재정권을 만들지도 않았고 지지하지도 않았으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원한다. 다만 그런 의사표시를 강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허버드의 발언은 외교적 수사(修辭)라기보다 진실에 가깝게 들린다. 미국이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의 쿠데타를 고무 찬양 지지했다는 사실적 근거는 아직 없다. 결과적으로 방관 묵인했거나 추인한 사실만 확인될 뿐이다. 미국은 한국의 예측불가능하고 불안정한 민주화보다는 군사적 안보와 정치적 안정(비록 독재체제라 할지라도)을 중시했고 그것은 냉전 시절 미국의 국익에 맞는 대한(對韓) 전략이었다. 미국은 결정해야 할 순간 신속히 그들의 국익에 따른 것이고, 허버드 대사는 그것에 조심스러운 유감을 표한 셈이다.
민주화 과정의 고통과 희생을 생각할 때 한국인은 허버드 이상으로 유감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돌아보면 우리의 민주화 지연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역설적 사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취약한 민주주의의 물적 기반과 민간 정치권의 무능과 분열, 낮은 단계의 시민사회 등 우리의 내적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 주권국의 자존(自尊) 아닌가.
자존과 국익의 관점에서 보면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가 방미 중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 동의했다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紙) 보도를 놓고 여야(與野)가 ‘그럴 수 있느냐, 오보다’라며 삿대질을 해대는 것도 꼴사나운 짓이다. 남북문제는 민족문제이자 국제문제다. DJ는 이를 한반도 내의 민족문제로 끌어오려 했고, 부시 행정부는 더 이상 햇볕정책의 효용성을 신뢰할 수 없다며 그들의 세계전략 속으로 끌어내려 한다. 이것이 한미 갈등의 본질이다. 따라서 현시점에서는 여야가 정략을 떠나 국익의 차원에서 민족 공조와 한미 공조의 간극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함께 고민하고 공동 대응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마땅하다. 같은 맥락에서 한미 정상회담 후 DJ와 이 총재는 당연히 만나야 한다.
▼美에도 北에도 당당해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달라졌다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그들의 국익을 추구하는 방법론이 달라진 것이다. 이에 대응하려면 줏대 없는 사대도, 현실성 없는 감성적 관념적 반미도 안 된다. 미국의 일방적 세계전략에 무턱대고 끌려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 수령 우리 사상 우리 군대 우리 제도가 제일’이라는 북을 언제까지 감성적 민족 공조로 감쌀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부시에게 당당할 때 김정일에게 당당할 수 있고, 김정일에게 당당할 때 부시에게도 당당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국익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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