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중현/협상의 ABC도 모르나

  • 입력 2002년 2월 18일 18시 09분


게임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자기의 패를 내보이는 일이다. 패가 들통나면 웬만해서 이기기 힘들다. 그래서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는 마음에 둔 진짜 목표를 짐짓 감추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 펼쳐지곤 한다.

재정경제부 홈페이지에 오른 도하개발어젠다(DDA) 대책반 보고서가 물의를 빚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은 농산물을 포함해 모든 협상의제에 있어서 선진국 입장에서 전향적으로 협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내용. 이는 2004년 시작될 쌀시장 재협상에서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제가 되자 재경부는 문건을 부랴부랴 지웠다.

다른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키우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산 철강에 대해 미국의 정부 기업 언론 등이 펼치는 합작 플레이나 우루과이라운드(UR) 당시 농업개방에 반대하며 정부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 유럽 농민의 시위 등이 그 예이다.

작년 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전문가들은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고려할 때 개도국 지위 유지가 힘들고 유지의 실효성도 적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같은 분석은 정책선택을 해야 할 정부에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농민들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개방에 반대하고 있다. 이는 협상테이블에 앉은 정부에 ‘뒷심’을 제공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정작 협상당사자인 정부는 협상카드를 미리 보여주고 만 것이다.

사실 한국의 교역량이 아프리카 전체의 교역량보다 큰 상황에서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렇지만 양보의 내용을 미리 알려준다는 것은 협상의 ABC도 모르는 일. 하다 못해 협상테이블에서 개도국 지위를 양보하는 대신 다른 것을 취할 가능성마저 이번 일로 물 건너 가버린 것이 아닌가.

국제협상에 나서는 당국자들은 게임의 기본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박중현 경제부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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