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정부4년]<1>기로에선 햇볕정책

  • 입력 2002년 2월 21일 18시 25분


《25일로 출범한 지 만 4년을 맞는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햇볕정책은 북-미 갈등으로 기로에 서 있고 각종 개혁정책은 잇단 시행착오와 거대야당의 제동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인사정책과 언론정책의 실패는 그동안의 성과마저 빛이 바래게 하고 정권 말기 레임덕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대선후보 경선에 돌입해 정부에 별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김 대통령은 이제 어떻게 임기를 마무리해야 하는가. 동아일보는 김대중 정부 4년을 결산하고 남은 1년의 과제를 짚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간의 20일 정상회담에서 드러난 대북 인식 차는 퇴색하고 있는 햇볕정책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외교적 수사(修辭)와 달리 북한정권에 대한 기본인식에서부터 북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방법론과 틀에 이르기까지 한미 간에는 쉽게 메우기 어려운 골이 있음이 이번 회동에서 거듭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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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정책 딜레마 2題

특히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 대한 내 의견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1월29일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한 이후 북한을 보는 미국의 시각에 전혀 변화가 없음을 입증한 대목이다.

햇볕정책의 상대인 북한의 태도도 예전 같지 않다. 베를린 선언(2000년 3월9일)에서 북한에 전력지원과 항만시설 설비 등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을 지원하고 대북식량지원 문제를 해소하겠다던 김 대통령의 약속이 사실상 무산되자 북한은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정상회담의 명암〓정부 관계자들은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로 △‘전쟁은 없다’는 약속을 받아낸 점 △북한 대량살상무기(WMD) 문제에 대한 미국의 대화의지를 확인한 점 △한반도 상황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이해증진을 꼽고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북한지도부에 대한 뿌리깊은 부정적 인식은 햇볕정책의 효용성을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얘기와 직결된다. 부시 대통령이 거듭 “북한이 햇볕정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밝힌 것이나 햇볕정책을 이산가족 교류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듯한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인식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한미 간의 결정적인 시각차는 우리 정부가 민족문제 차원에서 북한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교류 협력을 추진해온 반면 미국은 9·11 테러사건 이후 세계전략 차원에서 북한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에는 ‘유일한 대안’인 햇볕정책은 미국에는 ‘여러 대안 중 하나’인 셈이다.

부시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벌어졌던 반미시위와 여당의원의 부시 대통령을 겨냥한 ‘악의 화신’ 발언 등이 우리 정부가 햇볕정책에 맹목적으로 집착한다는 미국 측의 의혹을 증폭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성과도출 급급 ‘퍼주기’ 논란불러…北-美갈등 극복못하고 좌초 위기

▽햇볕정책의 성과와 한계〓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결정적으로 감소시켰다는 점만으로도 햇볕정책의 역할과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남북은 또 정상회담 외에도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중심협의체로서 6차례의 장관급회담을 열었고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국방장관회담(2000년 9월)까지 열어 경의선 철도와도로 연결 등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 노력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산가족상봉도 ‘전시성 행사’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의 교환방문을 통해 총 3600명이 상봉하고 1만902명이 생사와 주소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동안 남북관계는 줄곧 북한에 끌려 다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한 기대보다 지지부진한 진척을 보여온 게 현실이다. 각종 남북당국회담도 매듭이 풀리려다가 다시 꼬이는 양상으로 진행돼 왔다.

고려대 유호열(柳浩烈·북한학과) 교수는 “정부가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에만 치중하다 보니 남북관계를 왜 개선해야 하느냐는 목표감이 상실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정부는 하나가 잘되면 다 잘될 것이란 생각에서 김 위원장의 답방에 매달렸지만 남북관계 개선은 벽돌을 쌓듯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로에 선 햇볕정책〓6·15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한 우리 정부의 성취감은 역설적으로 주변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부단히 다듬어져야 할 햇볕정책의 탄력성과 유연성을 상실케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햇볕정책이 교조화, 신념화됨으로써 자기조정능력을 잃게 됐다는 얘기다.

김 대통령이 기업구조조정 등 산적한 국내 현안을 제쳐놓고 햇볕정책에 모든 것을 기울이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나 야당과의 협조를 도외시한 채 ‘홀로 뛰는’ 방식으로 남북문제를 추진한 것도 역풍을 자초한 원인으로 꼽힌다.

성과 도출에 급급하다 보니 빚어진 문제점도 적지 않다.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 인정’이 단적인 예다. 내부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북측 통일방안의 효용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줌으로써 초헌법적 행위라는 시비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경분리 원칙을 포기하고 금강산관광객 보조금을 지원키로 한 결정(1월23일)도‘원칙 없는 퍼주기’ 논란을 초래했다. 여기에다 지난해 평양 8·15 민족통일대축전 참석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남(南)-남(南) 갈등은 햇볕정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반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통일연구원 허문영(許文寧) 연구위원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만큼 이제라도 국민의 동의를 얻어 그동안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남북 간 사업 중 하나라도 제대로 매듭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및 북-미 관계 발언
시 기김 대통령의 발언 내용비 고
1998.2.25남북간의 화해 및 교류협력과 불가침, 이것을 그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에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 있다대통령 취임사
2000.9.112003년 퇴임하기 전에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를 희망한다뉴욕타임스 인터뷰
2001.2.16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계기로 한반도 냉전이 종식될 수 있도록 준비하라외교통상부 업무보고
3.20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시키는 ‘평화 프로세스’의 진행에 주력해 나갈 것이다공군사관학교 졸업식
8. 6북한이 대미관계에서 원하는 것은 빌 클린턴 전 미국 행정부와 합의한 내용에서 출발하자는 것으로 보인다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접견
8.11남북대화가 북-미관계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우려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미 상원 외교위원장 접견
8.15햇볕정책은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줄 것을 바란다광복절 경축사
9.13남북장관급회담에서 테러에 반대한다는 선언을 (남북이) 공동으로 한다면 의미 있는 큰 성과가 될 것이다청와대 수석회의
2002.1.14우리는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기로 결정한 이상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연두기자회견
2.20한미가 대화로 모든 것을 풀어나가자는 진지한 제안을 한 만큼 북한이 하루 속히 대화에 응하기 바란다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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