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의 워크맨, 도요타 자동차로 대표되는 제조기술은 세계 최고로 칭송받았으며 종신고용제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경영기법은 전세계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거품’이 꺼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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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 도산이 잇따랐다. 고도성장 이후 처음 겪는 경기후퇴였다. 세계 최대 채권국인 일본은 ‘이러다 좋아지겠지’라며 10년을 끌어왔다.
2000년이 되자 비로소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10년 이상 골병 든 체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마침 세계적인 정보기술(IT) 호황도 막을 내렸다.
뒤늦게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중증이었다. 지난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발족 때는 구조개혁을 통한 ‘일본 재생’에 희망을 걸었지만 최근 지지기반이 흔들리면서 ‘자신감 상실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
요즘 대형서점인 기노쿠니야(紀伊國屋) 신간 코너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제목의 책들이 넘쳐난다. ‘일본이 자멸하는 날’ ‘일본이 파탄할 때’ ‘2003년 일본국 파산’ ‘일본 비상사태 선언’ ‘2002년 일본경제-21세기형 공황의 첫해가 된다’ 등등.
한마디로 ‘일본은 곧 망한다’며 위기를 경고하는 책들이다. ‘2002년 4월 은행 붕괴’ ‘일본의 금융위기’ ‘은행과 주식, 대파국의 시나리오’ ‘디플레의 경제학’ 등 위기의 주범으로 금융 불안과 디플레이션을 지목한 책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일본이 처한 상황은 최악이다. 물가하락에 따른 경기침체(디플레이션)가 본격화되면서 기업 도산이 급증하고 실업률은 전후 최고 수준인 5.6%로 치솟았다.
경제성장률도 마이너스로 떨어졌고 4월 예금전액보호제도 폐지를 앞두고 ‘3월 금융위기설’로 흉흉하다.
한국은 98년 외환위기 때 세계적인 IT붐을 타고 돌파구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제조업에 안주해 IT 같은 새로운 성장 엔진을 찾는 데 실패했다. 장기적으로는 인구 감소와 노령인구 증가로 인해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정책 당국과 일반 국민은 태평하게까지 보인다. 고이즈미 내각은 출범 1년이 다 되가는데도 개혁 저항 세력의 반발 등으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국민도 이제 구조 개혁의 지연에 더 이상 불만을 터뜨리지 않는 분위기다.
도쿄(東京)의 한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토 가즈히코(佐藤和彦·23)는 일본이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10년 넘게 풀지 못한 숙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지금처럼 아르바이트를 해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충격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다시 경제 대국으로 올라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같은 분위기는 일본 국내 언론보다는 외국 언론들이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슬픔-작동하지 않는 국가’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일본은 서서히 내리막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더 슬픈 일은 일본 사람들이 이를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설혹 걱정은 한다고 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시사주간지 타임도 ‘태양은 또 다시 가라앉는다’는 커버스토리에서 ‘일본은 더 이상 미래가 밝지 않다는 끔찍한 진실에 직면해 있다. 언제 어떻게 일본 경제가 회복될지는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들 대지진과 같은 붕괴가 임박했느냐는 것만 궁금해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도 최근 일본에서 펴낸 저서 ‘공황의 함정(원제 Japan’s Trap)’에서 “일본은 정책적 재량의 여지가 있었던 90년대 초반 경제위기를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그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며 “일본 경제는 ‘슬로모션 불황’에서 급격한 불황으로 이행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각 국도 체념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8, 9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G7 재무장관회담에서는 일본의 경제 정책에 대한 지적도, 엔저 추세를 비판하는 발언도 전혀 없었다. 일본은 세계 무대에서 ‘무시당했다’며 당혹스러워 했다.
18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도 구체적인 조언 대신 ‘고이즈미 총리의 구조개혁을 지지한다’는 원론적 방침만 밝혔다.
일본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한 어떤 ‘훈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들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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