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정기총회에서 나온 말이다. 고백성사와 사면이라…. 그동안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 용서를 받으라는 것인데 40년 전경련 역사에서 재계가 이렇듯 대놓고 정치권을 나무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정치권력-관료-재벌의 수직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정경유착 구도, 즉 권력이 키워주고 관료가 컨트롤하고 재벌은 뒷돈을 대던 개발독재시스템이 ‘작동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지만 그렇다고 재벌이 정치권 뒷돈 대는 ‘관행’마저 없어진 건 아니다. 손길승(孫吉丞) SK회장은 얼마 전 “요즘 기업치고 이것 좀 봐달라며 자금을 주는 곳은 없고 다만 우리를 나쁘게만 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쁘게 하지 말아달라는’ 돈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국세청 체질 뜯어고쳐야▼
법적으로 정당한 정치자금 외에는 일절 내놓을 수 없다는 재계의 ‘당당한 선언’에 대통령도 잘한 일이라고 하고 여야(與野) 정치권에서도 별 까탈이 없으니 박수 짝짝짝 치고 끝내면 될 일 같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박수 쳐 끝낼 수 있다고는 대통령도, 정치권도, 심지어 큰소리친 재벌 측도 믿지 않을 터이다. 지방선거와 대선이 몰려 있는 올해 정치권의 소요자금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4500여억원이라는데 공식적 수입은 2900여억원, 1600여억원이 모자라는 셈이다. 최소한 이 돈이나마 어디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한 고백성사고 사면이고 몽땅 헛일이 되기 십상이다.
아니 세상에, 국세청 차장이 총대를 메고 나서 여당 대선자금을 166억원씩이나 걷어줄 수 있느냐는 ‘세풍(稅風)’도 조세권 악용 혐의라는 고약한 특징을 제하고 나면 정치권과 재계의 정치자금 뒷거래라는 오랜 관행의 ‘변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관행이니 적당히 넘어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잘못된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서라도, 특히 이 정권하에서도 드러났듯이 권력 측 이익을 위해 국가조세권을 사용화(私用化)하는 국세청의 그릇된 체질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라도 사건의 진상은 명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다만 상당기간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세풍’ 사건의 핵심인물인 이석희(李碩熙) 전 국세청 차장이 미국 도피생활 2년 반만에 미 연방수사국(FBI)에 검거됐지만 미국의 복잡한 사법절차 등으로 미루어 언제쯤 국내로 송환될지는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각종 ‘게이트’ 추문으로 코너에 몰린 집권 측으로서는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사정인 듯 싶다. 연말 대선의 호재(好材)가 그냥 날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도 있을 수 있다.
정치적 용도로서 ‘세풍’의 초점은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개입 여부다. 이 총재가 자금 모금을 지시한 것인지, 지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알면서 모른 척 한 것인지. 집권 측은 후자에 초점을 맞추는 모양이다. 입증이 되든 안 되든 개연성만으로도 이 총재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필자가 ‘세풍’의 또 다른 핵심인물인 서상목(徐相穆)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이 총재는 몰랐습니까?” 그가 답했다. “검찰에서도 당에 거금이 들어왔는데 총재에게 보고조차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추궁합디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이 총재는 ‘이상한 분’이라고요. 그 무렵 당내에서는 후보가 돈을 만들어오지 않고 어떻게 대선을 치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불평들을 해댔지만 이 총재는 돈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는 데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도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 아무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재벌회장의 직설화법▼
물론 사건 관련 당사자의 해명만으로 보편적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 없는 정치적 공세는 ‘이회창 죽이기’라는 강한 반발을 부르기 마련이다. ‘당신네 대선자금도 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역공도 만만치 않다. 이것이 ‘세풍’의 딜레마다. 재계에서는 모두 모두 고백성사하고 사면받으라고 한다. “정권만 바뀌면 기업인들이 곤욕을 치른다”는 한 재벌회장의 직설화법은 정치자금의 악순환이 끝나지 않았음을 함축적으로 시사한다. 이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세풍’의 진상을 밝히는 것 못지 않게 시급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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