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稅風'의 딜레마

  • 입력 2002년 3월 1일 18시 42분


“불법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불법적인 정치자금에 대해 국민에게 고백성사를 하고 사면을 받아야 한다.”

지난달 2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정기총회에서 나온 말이다. 고백성사와 사면이라…. 그동안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 용서를 받으라는 것인데 40년 전경련 역사에서 재계가 이렇듯 대놓고 정치권을 나무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정치권력-관료-재벌의 수직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정경유착 구도, 즉 권력이 키워주고 관료가 컨트롤하고 재벌은 뒷돈을 대던 개발독재시스템이 ‘작동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지만 그렇다고 재벌이 정치권 뒷돈 대는 ‘관행’마저 없어진 건 아니다. 손길승(孫吉丞) SK회장은 얼마 전 “요즘 기업치고 이것 좀 봐달라며 자금을 주는 곳은 없고 다만 우리를 나쁘게만 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쁘게 하지 말아달라는’ 돈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국세청 체질 뜯어고쳐야▼

법적으로 정당한 정치자금 외에는 일절 내놓을 수 없다는 재계의 ‘당당한 선언’에 대통령도 잘한 일이라고 하고 여야(與野) 정치권에서도 별 까탈이 없으니 박수 짝짝짝 치고 끝내면 될 일 같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박수 쳐 끝낼 수 있다고는 대통령도, 정치권도, 심지어 큰소리친 재벌 측도 믿지 않을 터이다. 지방선거와 대선이 몰려 있는 올해 정치권의 소요자금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4500여억원이라는데 공식적 수입은 2900여억원, 1600여억원이 모자라는 셈이다. 최소한 이 돈이나마 어디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한 고백성사고 사면이고 몽땅 헛일이 되기 십상이다.

아니 세상에, 국세청 차장이 총대를 메고 나서 여당 대선자금을 166억원씩이나 걷어줄 수 있느냐는 ‘세풍(稅風)’도 조세권 악용 혐의라는 고약한 특징을 제하고 나면 정치권과 재계의 정치자금 뒷거래라는 오랜 관행의 ‘변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관행이니 적당히 넘어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잘못된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서라도, 특히 이 정권하에서도 드러났듯이 권력 측 이익을 위해 국가조세권을 사용화(私用化)하는 국세청의 그릇된 체질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라도 사건의 진상은 명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다만 상당기간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세풍’ 사건의 핵심인물인 이석희(李碩熙) 전 국세청 차장이 미국 도피생활 2년 반만에 미 연방수사국(FBI)에 검거됐지만 미국의 복잡한 사법절차 등으로 미루어 언제쯤 국내로 송환될지는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각종 ‘게이트’ 추문으로 코너에 몰린 집권 측으로서는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사정인 듯 싶다. 연말 대선의 호재(好材)가 그냥 날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도 있을 수 있다.

정치적 용도로서 ‘세풍’의 초점은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개입 여부다. 이 총재가 자금 모금을 지시한 것인지, 지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알면서 모른 척 한 것인지. 집권 측은 후자에 초점을 맞추는 모양이다. 입증이 되든 안 되든 개연성만으로도 이 총재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필자가 ‘세풍’의 또 다른 핵심인물인 서상목(徐相穆)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이 총재는 몰랐습니까?” 그가 답했다. “검찰에서도 당에 거금이 들어왔는데 총재에게 보고조차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추궁합디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이 총재는 ‘이상한 분’이라고요. 그 무렵 당내에서는 후보가 돈을 만들어오지 않고 어떻게 대선을 치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불평들을 해댔지만 이 총재는 돈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는 데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도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 아무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재벌회장의 직설화법▼

물론 사건 관련 당사자의 해명만으로 보편적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 없는 정치적 공세는 ‘이회창 죽이기’라는 강한 반발을 부르기 마련이다. ‘당신네 대선자금도 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역공도 만만치 않다. 이것이 ‘세풍’의 딜레마다. 재계에서는 모두 모두 고백성사하고 사면받으라고 한다. “정권만 바뀌면 기업인들이 곤욕을 치른다”는 한 재벌회장의 직설화법은 정치자금의 악순환이 끝나지 않았음을 함축적으로 시사한다. 이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세풍’의 진상을 밝히는 것 못지 않게 시급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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