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끼리 자택서 밀실정치▼
이 사진은 우리 정치의 내면과 논리를 예리하게 서술할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론영역의 구조변동’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구도는 그것이 서술하고자 하는 현실만큼이나 간단하다. 중앙에는 언급되고 있는 정치인이 자리잡고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으며, 그의 앞에 놓여 있는 탁자 양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 정치인에게로 고개를 돌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하얀 셔츠 차림의 정치인은 어두운 색 계통의 옷을 입은 주위 사람들과 대비되어 더욱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이들의 뒤로는 주름잡힌 커튼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보스는 말하고, 측근들은 듣기만 하고, 정치는 외부와 차단된 자택의 내밀한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이미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사진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공론 영역이 사적인 것에 의해 지배받는 것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일찍이 공익보다 사적인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의 경제 중심적 문화가 등장함으로써 공론 영역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진단한 바 있다. 결국 공적인 영역마저 사적인 것에 의해 지배받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사적인 공간과 공공 장소가 어느 정도 분명하게 구별되었던 시절에 자택이란 사회 문제와 갈등 및 어수선함으로부터 보호된 쾌적한 친밀성의 공간이었다. 정치는 가정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공적인 삶은 집의 ‘바깥’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개인의 권리와 사적인 자율성이 절대화되면 될수록 사적인 것이 사회로 침투해 들어와 점점 더 공적인 문제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은밀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전화박스마저 이제는 더 이상 사적인 공간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며 온갖 사적인 문제들을 공공연하게 내뱉지 않는가. 그들은 다른 사람의 귀와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사업 문제를 논한다.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는커녕 오히려 사적인 것의 공공연한 전시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속옷 패션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다니며 길을 걸어가면서도 음식을 먹는다. 간단히 말해 과거에는 사적인 영역에 속했던 많은 것들이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 공공의 장소로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사적인 것의 이러한 이상 비만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해나 아렌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통사회에서 ‘사적(私的)’이라는 말은 무엇인가가 ‘박탈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인과 공동의 문제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공공성의 박탈이 사적인 것의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사적인 것을 타인에게 기꺼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현대 문화는 정치마저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이 사진은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을 암시한다. 사적인 것이 공론영역에 침투해 들어올수록 가장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는 사적 공간의 어두운 커튼 속에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투명성 회복해야 미래밝아▼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우선 과거의 사적인 공간처럼 숨겨져 있어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아렌트의 가족처럼 운영되는 정치집단은 본질적으로 공공의 비판적 시선을 차단한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우리가 옳다’는 주관적 판단과 감정적 유대에 토대를 두고 있는 ‘친밀성의 폭력’이다. 사적인 것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있는 우리의 정치가 공공의 투명성을 다시 회복하지 않는 한 친밀성은 폭력을 낳고 사(私)는 공(公)을 파괴할 것이다. 자택, 측근, 장막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난 정치의 이미지는 없는 것일까.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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