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를 합시다]노영옥/병원진료 ´새치기´하지 맙시다

  • 입력 2002년 3월 11일 18시 26분


얼마 전 이러저러한 일로 바쁘던 와중에 전화 몇 통을 받았다. 그 날은 평소보다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그 중 2건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하나는, 아는 사람이 허리가 아파 지방에 있는 병원에 다녔는데 서울이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며 유명한 의사가 누구인지, 어떻게 하면 진료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온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경기로 인해 호흡곤란을 겪었던 사람이 질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는 것이었다. 의료업은 그 특성상 대중매체를 통한 광고가 불가능해 많은 사람들이 병원이나 의사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직업의식으로 알고 있던 지식들을 동원해 이들의 궁금한 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전화를 끊지 못했다. 전화를 건 실제 용건은 내가 다니는 병원에 손을 써서 진료를 빨리 받거나 수술을 빨리 받게 해달라는 요청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예약이 되지 않는 초진을 예약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그들의 청이었다.

얼마나 기댈 곳이 없으면 평범한 병원 직원인 나에게까지 이런 부탁을 하겠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졌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일이든지 아는 사람이 있어야 대접받고 빠른 시간에 할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습에 몹시 씁쓸했다.

그렇다. 가까운 놀이공원에서도, 병원에서도 아는 사람이 편의를 봐주면 줄 서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카페에서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서비스가 달랐다. 그래서 사회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가 있어야 어디든지 줄서지 않고 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아는 사람을 찾아 편의를 봐달라고 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이 같은 일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풋풋한 인정이 넘치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런 부탁을 거부하면 인정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런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싫어 적당히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둘러대고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영 말이 아니다. 힘이 없어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병원은 그런 곳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구나 오래 기다리면 힘들고, 화가 날 것이다. 하물며 아픈 환자는 어떻겠는가. 아프고 불편한 것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시간에도 진행되는 질병이라면 그 환자의 삶은 누가 보상하겠는가. 물론 아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문득 지하철 경로석에 써 있던 문구가 생각이 났다. ‘나는 젊었거늘 서서간들 어떠리’. 모두 아프고 불편한 사람들이지만 많은 사람들 틈에서 숨을 고르며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직은 더 많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건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이지만 당장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원에서 기다리는 순서가 바뀔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환자의 중증도(重症度)에 의한 것이어야 함을 모든 사람이 당위로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노영옥 연세의료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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