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짓는 집]'쓸모 적은' 이야기의 매혹적인 속삭임

  • 입력 2002년 3월 15일 17시 23분


대한제국 말기 서울에 머물렀던 미국인 허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집문당)를 읽다 보면 영국인 배즐 홀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해군으로 복무했던 홀은 일본과 조선 등을 여행한 뒤에 ‘류큐 탐사기’를 썼는데, 1817년 귀국하는 길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들러 나폴레옹을 만난 일이 있다. 이 때 나폴레옹은 류큐에는 칼도 없고 전쟁도 하지 않는다는 홀의 얘기를 듣고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큰 관심을 표했다. 유배지의 나폴레옹에게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얘기였을 텐데, 왜 그는 그 얘기가 그토록 끌렸던 것일까?

유럽은 커녕 동네도 정복한 일이 없는 내게도 그런 흥미를 느끼게 해준 책이 있다. 예컨대 모나코 출신의 빌리 클뤼버가 쓴 ‘피카소와 함께 한 어느 날 오후’(창조집단 시빌구)가 꼭 그랬다. 클뤼버는 파리 예술가 공동체의 기록 사진을 수집하다가 익명의 아마추어 작가가 찍은 스냅 사진 5장을 구했다. 그는 이 사진과 같은 날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찾아 나서 모두 29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에는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 장 콕토 등이 등장했다. 클뤼버는 등장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이 사진들이 1916년 늦봄이나 여름에 찍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대부분은 여기서 추적을 멈출 테지만 클뤼버는 파리 경도 조사국에서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진 속 건물의 그림자 각도를 계산해 그 날이 8월 12일이라는 사실과 각 사진을 찍은 정확한 시간까지 알아냈다. 클뤼버에 따르면 그 29장의 사진은 1916년 8월 12일 오후 12시 45분부터 4시 30분 사이에 찍었다. 그리하여 클뤼버는 “1916년 8월 12일 토요일은 섭씨 27도의 따뜻하고 햇살 좋은 하루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을 한 권 쓸 수 있었다.

이 지루한 추적 과정과 사진 설명을 읽다 보니 왜 나폴레옹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극동의 섬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어째서 류큐를 일컬어 ‘그런 곳이 있다면 천국’이라고 말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런 소용도 닿지 않는 그 쓸데없는 얘기가 쓸쓸한 나폴레옹을 달래줬을 것이다. 내 처지와는 무관한 클뤼버의 책을 읽으며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듯이.

청나라 사람 장조의 ‘내가 사랑하는 삶’(태학사)을 읽노라면 옮긴이 정민 교수가 덧붙인 글이 눈에 들어온다. “명나라 때 이장형은 호수 위의 산들을 사랑하여 ‘산 꼭대기마다 1년씩 머물렀네(每箇峯頭住一年)’란 구절을 남겼다.”

먼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 집요하게 뭔가를 추적하는 사람들, 산 꼭대기마다 1년씩 머무르는 사람들.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쓸모 적은’ 얘기가 때로 우리를 달래줄 때가 있다.

김연수 소설가 larvatus@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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