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中문화가 종이를 타고 서양에… '페이퍼 로드'

  • 입력 2002년 3월 15일 17시 23분


페이퍼 로드/진순신 지음 조형균 옮김/296쪽 1만2000원 예담

‘아나톨리아 페르가몬 왕조 에우메네스 2세(기원전 197∼159년)는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대도서관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문제는 엄청난 양의 파피루스. 이집트는 자신들이 만든 세계 최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보다 큰 도서관이 출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파피루스 수출을 거부했다. 에우메네스 2세는 더 뛰어난 필사재료를 개발하라고 가신(家臣)들에게 명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양피지(羊皮紙)다.’

인간이 종이를 쓰기 이전부터 기록의 역사는 있었다. 그러나 종이의 발명은 기록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과연 종이는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제지법은 어떻게 유럽으로 전해 졌을까? 비단이 전해진 동서교통로를 ‘실크로드’라고 부르듯 종이가 서양을 비롯한 전세계로 전해진 길 또한 ‘페이퍼 로드’(Paper Road)’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의 유명한 역사 소설가 진순신(陳舜臣)은 이런 호기심에서 기원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과 사상 전파의 근간이 된 종이의 역사를 되짚어 본 역사 기행서를 썼다.

우리는 흔히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을 비롯한 여러 생활용품, 사상, 문화, 예술 등이 동에서 서로 전해졌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종이’다. 종이는 후한 화제(105년)때 환관 채륜이 발명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그의 제조법이 서역에 전파된 것은 7세기경으로, 탈라스 지방에서 일어난 전투가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 역시 모두 가정일 뿐 정확한 시기나 관계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종이가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종이가 서양으로 전해진 과정에도 수많은 상인들과 군인 등 역사속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있었고 저자는 바로 그들을 되살려 내고 싶었다고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 이 모래사막을 거쳐 중국의 제지법이 사막으로 전해졌다

‘페이퍼 로드’는 종이를 만들고 서역으로 전한 수많은 이들의 행적을 좇아 써 내려간 이야기다. 저자가 말하는 ‘페이퍼 로드’는 중국의 뤄양(洛陽)에서 시작해 둔황(敦煌)을 거쳐 유럽의 리베리아 반도 남부까지, 종이가 전달된 길을 일컫는다.

중국의 제지법은 고선지, 아부 무슬림, 담징, 현장 등 역사속의 인물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거친 사막과 초원을 말을 타고 달렸을 돌궐, 거란, 이슬람 민족들에 의해 서쪽으로 전해졌고 13세기에 이르러 유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전한 것이 종이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종이를 전한 민족들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생활과 문화가 함께 담겨 있었다. 따라서 종이야말로 동서 문화교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속내는 단지 종이의 교류과정이 아니다. 동서교통로를 서양적 관점이 아니라 동양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작가 후기를 옮겨보자.

“실크로드라는 말은 서양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인데 이 말은 원료가 불분명한 기적의 직물 비단을 낭만으로 가득찬 물건으로 생각한 서양적 상상력이 원천이 된 말이다. 절묘한 이름짓기라고 할 수 있지만 절묘함이 지나쳐 이 길로 운반된 여러 가지 것들이 빛을 잃어버렸다. 사실 이길을 지나간 가장 중요한 것은 비단처럼 어떤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과 관련된 것, 사상이나 신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실크로드는 사상의 길, 혹은 신앙의 길이기도 했다. 종이는 사상과 신앙을 전하는 도구였지만 (서양 사람들 눈에 보기에) 낭만적이지 않은 수수한 물건이어서 아무도 페이퍼로드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저자는 고증과 자료를 인용하되 학설을 늘어놓고 비교하는 역사서식 서술이 아니라 기행문을 쓰듯 에세이적 문체를 택해 읽는 맛을 느끼게 했다.

책을 읽다보면 역사속에서 잊혀져 간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동서교역로를 오가던 수많은 상인들과 머나먼 타국에서 경전을 찾아 다니던 승려 그리고 권력과 명예를 위해 전쟁을 벌였던 장수들…. 그러한 과정들을 숨가쁘게 따라가다 보면 지금 앞에 놓여있는 종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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