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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의류업체인 이랜드의 인트라넷(지식몰)에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공개하는 글들이 쌓여 있다. 스스로 깨우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지식을 이 곳에서는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노하우를 공개한 직원은 승진이나 성과급 심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
삼성생명 지식경영팀은 우수 생활설계사와 현장소장이 하루 일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인트라넷의 ‘노하우 뱅크’ 코너에 게시한다. 동영상으로 찍는 이유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노하우까지 직접 보면서 배우라는 취지. 이 코너에는 매일 아침 접속이 쇄도한다.
최근 열풍처럼 번지고 있는 지식경영(KM·Knowledge Management)의 현장이다. 요즘 많은 기업들은 직원 개개인이 가진 업무 노하우를 끌어내 다른 직원들이 공유하도록 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왜 지식경영인가〓“지식경영 시스템을 이용하면 10년차 과장이 해야 할 일을 5년차 대리가 할 수 있다.”
두산건설의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병화 현장소장은 지식경영을 이렇게 요약했다.
99년 3월부터 두산건설은 최초의 실패사례를 올린 팀에는 잘못을 묻지 않고 ‘면죄부’를 준다. 이 소장은 “건설공사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경험인데 이 제도를 활용하면 다른 직원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식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기도 한다. SK㈜ 지식경영팀 주진복 팀장은 “지식공유가 활발하고 학습모임이 많이 생겨나 전임자 후임자 간에 업무 인수인계가 필요 없을 정도가 됐다”면서 “학습모임에서 나온 새로운 지식을 사업에 적용해 최소 수백 억원의 이득을 봤다”고 말했다.
지식경영의 선구자 가운데 하나인 잭 웰치 전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장은 “업무로 터득한 경험이나 지식을 자신의 컴퓨터나 수첩에만 보관하는 것은 회사 공금을 개인계좌에 넣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무엇이 지식인가〓‘가게 위치는 진행방향 오른쪽이 왼쪽보다 유리하다’ ‘상권(商圈)을 보려면 근처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라.’ LG유통이 지식경영을 통해 직원들로부터 모은 노하우다.
그동안 버려졌던 출장보고서, 업무 매뉴얼 등 문자화된 정보부터 ‘개념화가 쉽지 않은’ 노하우까지 회사 경영에 필요한 모든 지식이 포함된다. 지식경영이 정착하면 도제 교육을 통해서만 전수된다고 여겼던 노하우까지 글, 소리, 영상으로 저장돼 새로운 지식 창조의 기반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업무 성격에 따라 지식도 천차만별. 한 기업의 대외협력팀은 협상 파트너의 성격이나 좋아하는 음식, 술버릇, 취미까지 상세히 기록한 인물 파일을 작성하고 있다.
▽지식을 털어놔라〓직원들은 ‘회사에서 인정받으려면 나만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지식을 끌어내기 위해 기업들은 온갖 묘책을 내놓았다.
‘지식 마일리지 평가제’를 도입한 현대백화점은 직원들이 회사 정보망에 지식을 등록하면 0.1∼20점의 점수를 주고, 이를 누군가 조회할 때마다 0.1점을 보태는 방식으로 점수를 쌓아 1000점마다 10만원씩 지급한다. 특급 노하우에 대해서는 포상은 물론 인사고과에 반영한다.
LG유통은 건당 5000원씩을 주며 직원들의 노하우를 사들인다. 이 밖에 SK㈜, SK텔레콤, 삼성코닝, 삼성SDS, 금강기획, 이랜드, LG전자 등도 비슷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대림산업은 회사의 ‘명예의 전당’에 지식경영 기여자의 이름을 올린다.
▽갈 길은 멀다〓4, 5년 전 지식경영을 시작한 기업 중에는 본궤도에 진입한 곳도 있다. 하지만 지식경영의 최고 단계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평가다.
이화여대 김효근 교수(경영학과)는 “개인과 조직의 이해가 상충하고 회사를 운명공동체로 여기는 의식이 옅어지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지식경영이 나오기는 힘들다”면서 “지식경영의 토대는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인데 이에 대해 국내 기업들, 특히 최고경영자(CEO)의 이해가 그리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최고지식경영자(CKO)클럽이 30개 회원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CEO의 의지를 지식경영 성공의 첫째 조건으로 꼽았다.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지식경영연구센터 김영걸 교수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수준까지 가려면 부서의 벽은 물론 한 기업의 벽도 넘어야 한다”면서 “국내 기업 가운데 이런 수준에 도달한 기업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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