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질서 新문명⑩]독일 뮌헨대 울리히 벡 교수

  • 입력 2002년 3월 17일 17시 44분


《독일의 세계적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 뮌헨대 교수와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근대성과 탈근대성, 그의 위험사회론과 9·11 테러,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등 우리시대 사회변동의 흐름과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가 맡았다. 》

-선생께서는 우리시대의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제2의 근대성’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제2의 근대성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근대성’ 또는 ‘탈근대성’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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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2의 근대성을 이야기한 배경에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급격한 사회변동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근대성의 자연스런 기반으로 간주돼 온 여러 가지 특성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됐습니다. 사회와 민족국가의 동일시, 완전고용의 이상, 계급적 대중정당, 남녀역할 구분을 기반으로 한 핵가족 등을 제1의 근대성 지표들이라고 할 때, 이것들이 제2의 근대에 와서 의심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처럼 제1, 제2의 근대성을 구분한다 해도 공통적인 근대성은 존재합니다. 따라서 근대성의 기본 원리들과 제1, 제2의 근대성의 기본 제도들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컨대 ‘국가성’이 근대성의 기본 원리라면 ‘민족국가’는 제1의 근대성, ‘코스모폴리탄적 국가’는 제2의 근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성에 대한 정의는 관점과 체험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근대화의 경험과 근대 프로젝트에 대한 논쟁들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그렇지만 탈근대성 이론가들의 경우는 오늘날의 이런 도전들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개념과 제도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료▼

- 독일 뮌헨대 울리히 벡 교수 인터뷰 전문

-선생의 이론에 따르면 ‘위험사회’의 도래는 제2의 근대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9·11 테러는 위험사회의 한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위험사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 위험사회에 대처할 수 있습니까?

“위험사회의 핵심적인 특징은, 측정가능한 리스크(Risk·구조 및 체계와 관련된 위험을 뜻한다)와 측정불가능한 불확실성 간의 경계, 객관적인 리스크 분석과 사회적 리스크 인식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존의 사회적 궁핍이 계층별로 차별적이었던 데 반해, 새로운 위험은 오히려 ‘민주적’입니다. 그것은 부자와 권력자를 포함해 사회의 전 영역을 뒤흔듭니다. 둘째, 위험은 그 진원이 되는 한 부분에 제한될 수 없습니다. 셋째,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리스크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스크에 대한 의식이 고조됩니다. 넷째, 안전이라는 가치가 평등이라는 가치를 몰아냅니다. 이와 함께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한 전체주의’가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시민들의 불안이 증가함에 따라 ‘안전’은 물이나 전기와 같이 공적으로 생산되는 소비재가 될 것입니다. 9·11 테러 이후 세계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구조적 특성들 중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시대 사회변동의 두 가지 추동력은 세계화와 정보화입니다. 선생께서는 세계화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초민족적 국가’와 ‘하위정치’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과연 이 전략들은 세계화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1의 근대에서는 사회들이 민족국가적으로 조직되는 일종의 ‘방법론적 민족주의’가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국가’라는 동일성은 오늘날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9·11 테러 이후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전지구적 동맹은 대외적 안보뿐 아니라 국내적 안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 됐습니다. 국가적 안보와 국제적 협력이 직접적으로 결부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적 원칙이 적용됩니다. 즉, 국가들은 자신의 민족적 이해를 위해서 탈민족화해야 합니다. 전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민족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율성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친밀성’의 변동은 중요한 사회변동의 하나입니다. 한국사회에서도 최근 30대의 이혼율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과 친밀성의 혼란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제2의 근대 사회에서 과연 삶의 윤리적 원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성(性), 결혼, 부모, 이혼 등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족의 삶에서 내부와 외부, 우리와 타자, 남자와 여자,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에 대한 정의는 점점 더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생활형태와 역할구분 등에서 이런 다원화가 일어나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제도화된 개인주의화’라 부를 수 있는 사회변동입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사회관계가 해체돼 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현대사회에서 태동한 노동시장, 복지국가, 교육체계, 법체계, 관료제 등과 같은 각종 제도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주의화가 모든 사회적 결속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어진 결속의 자리에 이제는 스스로 선택한 관계, 즉 친교관계, 네트워크, 사회도덕 등이 들어서게 됩니다. 이런 관계들은 얼핏 서로 대립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즉 자기실현과 타자를 위한 삶을 서로 결합시킬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개인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을 갖는 젊은 세대들을 ‘자유의 아이들’이라 명명한 바 있습니다. 서구사회뿐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도 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의 아이들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그리고 이들이 사는 세상에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조화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개인주의화가 자동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아이들’은 공동체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공동체란 자기실현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당이나 노조 등과 같이 이제까지 정치적 의지를 형성해 온 조직들은 개인의 자아실현을 집단이익에 종속시켜 왔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개인주의화된 공동체와 가족관계는 어떤 주어진 집단적 규범, 위계, 조직에 의해서 통합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리스크를 동반한 자유’입니다.

개인주의화된 생활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이 가치의 타락이나 자아도취가 아닙니다. 진정한 위협은 다양한 생활세계들의 창조적 동력을 정치적이고 공적인 주제들로 변화시키는 데 실패하는 경우입니다. 개인적인 삶의 기반들은 오직 타인들과의 공적이고 정치적 교류 속에서만 획득되고 방어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화와 세계화 과정 속에서 이런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어느 정도 깨어있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좌파와 우파의 전통적 이분법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해 왔습니다. 서구사회에서 이 이분법이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은 무엇입니까?

“세계화와 더불어 새로운 갈등의 동학(動學)이 형성됐습니다. 세계화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은 사람들과 잃은 사람들 간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이 갈등은 특히 시장관계로부터 보호된 부문과 노출된 부문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국제적인 탈규제의 압력 하에서 양자의 대립은 더욱 첨예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좌우 대립은 세계화의 수혜자와 피해자 간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갈등구조 속에서 그 기반이 잠식되고 재조직됩니다.

정치와 국가에 관한 저의 테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통해 16세기의 종교적 내전을 종식시켰듯이, 20∼21세기의 민족적 세계내전은 국가와 민족의 분리를 통해 응답돼야 합니다. 폐쇄적인 민족적 국가인가 아니면 개방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 국가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오늘날, 좌우 대립이라는 용어는 그 의미를 크게 상실했습니다. 제2의 근대에서 자의식을 가진 민족들로 이루어진 코스모폴리탄적 유럽이라는 기획은 하나의 ‘현실주의적 유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끝-

정리〓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울리히 벡 교수는…▼

울리히 벡(Ulrich Beck) 교수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니클라스 루만 이후 독일이 낳은 최고의 사회학자다. 그는 1986년 ‘위험사회’를 시작으로 지난 10여 년 간 일련의 화제작을 연속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열어 왔다.

그의 사회학 저변에 흐르는 문제의식은 ‘근대성’의 재해석이다. 그는 완고한 모더니스트도 아니고 날렵한 포스트모더니스트도 아니다. ‘제2의 근대성’ 또는 ‘성찰적 근대성’이 그의 이론적 거점이다. 세계화의 증대와 위험사회의 도래는 제2의 근대성의 대표적인 징표다.

그의 사회학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첫째, 그는 당대 사회변화를 분석하는 사회학 본연의 과제에 충실하다. 그의 이론적 목표는 근대성과 탈근대성,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데 있다. 둘째, 그의 글쓰기는 전문적 독자와 대중적 독자를 모두 아우른다.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그의 책들은 언제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왔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분명 현대 문명의 새로운 문턱 위에 서 있다. 그의 장점은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해 온 것들과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그 문 안의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에 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두려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성찰에 대한 신뢰’와 ‘변화에 대한 용기’를 갖고 있다면 미래의 역사는 우리편이라는 것이다.

1944년 슈톨프에서 태어난 그는 뮌헨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뮌스터대와 밤베르크대를 거쳐 현재는 뮌헨대 사회학연구소와 영국 런던정경대 사회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 ‘정치의 재발견’ ‘성찰적 근대화’ ‘자유의 아이들’ ‘세계화란 무엇인가’ ‘적이 없는 민주주의’ 등의 저작을 발표했으며,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자문역을 맡는 등 현실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왔다.

김 호 기(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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