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속한 인간은 어떻게 가족을 꾸리고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갈 것인가를 걱정하지만, 고상한 인간은 가족과 사회, 국가라는 제도나 구조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를 고민한다. 범속한 인간 중에도 매일매일의 일상을 살기에 급급한 ‘마지막 인간’에서부터 사회를 이끌고 국가를 경영할 고민을 하는 ‘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이 있다. 고상한 인간의 스펙트럼 역시 제도와 구조의 필연성을 회의하는 데 그치는 ‘니힐리스트’부터 혁명과 기존 질서의 해체를 꿈꾸는 ‘초인’까지 다채롭다.
앞의 유형은 여전히 근대를 살고 있는 인간이며, 뒤의 유형은 근대를 벗으려는 존재다. 저자는 탈근대를 꿈꾸는 니힐리스트와 초인의 중간쯤에 서 있다. 20세기의 내리막길에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린 근대국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그는 근대국가의 국민형성 과정에 대한 분해와 조립을 통해서 답하려 한다. 서평과 에세이 그리고 학회보고서 등 총 14편의 길지 않은 글들로 구성된 이 책은 근대국가와 문명에 관한 본격적 비판 ‘논문’을 수록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상당한 지성적 질량감으로 압박해 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다수의 포스트모던이 그러하듯이 저자는 근대세계의 합리와 이성, 특히 그 실현체인 헤겔의 국가를 부정하면서 근대국가에 길들여진 변종인간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근대의 형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괴물(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며 관심을 가졌던 것이 국가였다면, 탈국가를 지향하는 탈근대론자들에게 국가는 더 이상 가치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그리고 그 국가에 의해서 개조된 인간이 이들의 천착 대상이다.
국가가 인간을 회수하고 징집하는 근대적 현상, 회수되고 징집돼 개조된 인간이 비인간화돼 가는 것을 개탄하는 저자가 논리전개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도 당연히 근대적 이성과 상식의 부인이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할 때 기존의 상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근대문명비판의 초보적 방법론이다. 지구 표면이 250개 남짓한 국민국가로 거의 뒤덮여버리고 만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근대 국가는 국민을 형성하기 위해 인간의 시간 감각과 신체마저도 개조하지 않았는가 등 일상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던 것들에 도전하여, 인간이 어째서 상호살상을 마다하지 않는 괴물로 만들어졌는가를 추궁한다.
결국 모든 국가는 상호호환성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그 장치의 모듈성(기능적 교체가능성) 때문에 형성과 성장, 행위의 과정이 동일하며, 이들이 이루는 세계체제라는 것도 구성분자들의 동일 패턴, 즉 팽창주의적 침략과 전쟁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따라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죄악을 근대국가의 이성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교묘한 함정을 발견할 수도 있다.)
사람이 국민으로 되는 메커니즘은 근대적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문학, 예술, 경제, 역사, 가족, 교육, 과학, 종교 심지어는 반국가적 활동조차 국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가를 강화해 주고, 이 영역의 인간들은 국가로 ‘회수’돼 간다. 일본의 민권론자들이 왜 군국주의의 강물에 휩쓸려 갔는가, 한국의 체제비판적 지식인들이 왜 통치기제에 투항했는가 등에 대한 의문을 이 책은 간접적으로 설명해 준다.
저자에게는 자유주의 국가든 파시스트 국가든 그것이 근대의 국가인 이상 비인간적 국민통합의 메커니즘(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제도)을 통해 공간, 시간, 습속, 신체, 언어, 사고의 국민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생존과 안전에 관한 집착에서 비롯하는 국가의 죄악과 인식하지 못하는 국가의 억압 메커니즘, 그리고 국민이라는 훈련된 허위적 정체성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 책을 읽더라도 바로 괴물은 ‘국민’이 아니라 여전히 국가이고, 그 국가를 창조해낸 인간이야말로 괴물이 아니냐고 반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을 국민화(국가의 인간회수)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며,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의인화된 국가는 인간의 인간지배를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합리적 근대인은 국민국가의 괴물적 속성만을 이야기하면서 근대적 사고가 만들어 놓은 그리고 근대국가가 이룩해 놓은 긍정적 결과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저자의 자세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서구에서는 1648년 이래 근 4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100년 정도의 격변기를 구성하는 국민국가의 형성 발전을 폄하하는 것은 장기적인 역사적 시야를 가지고 있는 존재론자들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 국가와 국제 시스템의 존재 이유에 관한 국제정치적 논의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자의 철학적 조망이 국제관계에 관한 무지 혹은 무시의 반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저자는 탈국가의 대안으로서 점진적이고 조심스러운 국가의 상대화, 국민의 상대화, 국민으로서의 자아의 상대화를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종국적 목표인 세계체제의 근본적 혁명 해체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국민국가의 전횡과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를 고집한다면, 사실상 혁명과 해방의 그날은 요원하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1968년의 ‘혁명’(파리)과 1989년의 ‘혁명’(베를린)은 사회의식의 변화에 의미를 지니지만, 국가가 날로 횡포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저자가 말하는 “국가로 회수되는 무수한 회로를 확실히 응시하고, 그 회로에서 몸을 빼기 위한 궁리와 노력을 하는 것” 이외에 급격한 대안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도대체 이 따위 나라가 어디 있어?”라든지 “세상이 뭐 이래?”와 같은 통속적 문제의식을 고상한 철학적 물음으로 약간이라도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읽을 수 있다. 시민의식이 철저한 근대적 인간이라면 “국가 해체 후의 생존과 안전, 복지에 관해서는 누구와 어떠한 계약을 체결해야 하나?”라는 시비를 걸면서 시니컬하게 읽을 수 있다.
국가와 근대, 혁명과 탈근대, 문명과 문화, 국가시스템과 세계체제 등 인문사회계의 현란한 용어가 빠짐없이 출현하는 일종의 비평집이지만, 원고지 넉 장이 한 페이지가 되는 조판이라 빨리 페이지를 넘기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웅 현 고려대 연구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