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인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비슷하다. 삼성전자의 ‘애니콜’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소비자 잡지인 ‘컨슈머 리포트’ 2월호에 최우수 휴대전화로 선정됐다. 또 정보기술(IT)전문지인 ‘트와이스’에는 18∼34세의 고소득층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으로 소개됐다. 애니콜은 한국기업이 처음부터 고급제품으로 승부를 걸어 세계시장에서 성공한 거의 유일한 상품이라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크다. 이 같은 마케팅 신화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삼성전자 조진호 애니콜마케팅그룹장은 고급 내수시장을 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휴대전화 과소비’가 해외시장을 휘어잡는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성공 신화(神話)’는 우리 사회 일각에서 흔히 지적하는 ‘과소비 논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한다.
전자제품과 자동차 등 내구재와 서비스 소비 고급화는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고 물가를 끌어올리며 국제수지를 악화시킨다며 사회악(惡)으로 몰아붙이는 논리가 우리 사회에는 적지 않다. 그러면 과연 소비고급화는 한국경제를 위협하는 ‘독(毒)’인가.
▽“고급소비가 없으면 고급생산도 없다”〓‘우리는 넥타이 하나로 자동차 한대만큼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고 자부하는 프랑스가 ‘명품’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데도 고급소비라는 배경이 있었다. 보석디자이너 홍성민씨는 “20세기 초반에 돈 많은 상류귀족과 신흥부자들이 넘쳐났기에 파리가 패션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초중반 한국 의류업체들이 북한에 진출, 임가공사업을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디자인과 색감 지도였다. 당시 북한 의류임가공사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디자인이나 색감은 일상생활 속에서 오랜 경험과 느낌으로 체득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과 달리 전수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소비고급화는 선진국으로 가는 필요조건”〓한국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처럼 값싼 상품이 아니라 고급제품으로 세계시장을 뚫어야 한다고 경제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기업이 해외 고급품 시장을 뚫고 들어갈 자본력 기술력 마케팅력 등을 갖추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서울대 국제지역원 문휘창 교수는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으로 들어서는 단계에는 근검절약이 강조됐지만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단계에는 소비고급화가 중요한 국가경쟁력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해외시장 진출은 제쳐두고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제품 고급화와 대형화가 필요한 업종도 많다. 대표적인 업종이 가전산업.
작년 9월 현재 가구당 주요 가전제품 보유대수는 TV 1.43대, 냉장고 1.08대, 세탁기 0.96대, 에어컨 0.29대 등이다. 생필품형 가전제품은 이미 포화상태. 사치품이라고 불리는 에어컨 시장을 개척하거나 TV 냉장고 세탁기 등을 대형화 고급화해 대체수요를 개발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산업고도화를 위해 고급 소비시장을 어느 정도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많은데도 사회적 분위기는 고급품 소비자뿐만 아니라 기업까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고 있다.
‘소비시장 고급화와 기업의 대응’이라는 논문의 공동저자인 삼성경제연구소 이상민 수석연구원은 “기업 마케팅 담당자들을 여러 명 인터뷰한 결과 소비고급화를 죄악시하는 사회분위기가 고가품 시장에 대한 기업의 대응에 큰 짐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소비고급화 억제의 또 다른 손익계산서〓세계 명품만 판매하는 모백화점 명품관의 매출실적을 보자. 97년 842억원, 98년 918억원, 99년 1233억원, 2000년 1534억원, 2001년 1839억원이었다.
‘사치성 소비’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가장 심하게 견제를 받는 것 중의 하나가 골프. 정부는 골프장을 지을 때 세금을 수십배씩 중과세하고 입장요금에도 특별소비세를 매긴다.공직자가 골프장에 출입하다가는 인사상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그 부작용으로 더 싸고 남의 눈치볼 필요도 없는 해외 골프장을 찾는 골퍼가 크게 늘고 있다. 99년 1만8492명, 2000년 5만243명, 2001년에는 9만1170명이 골프채를 들고 해외로 나갔다. 골프채를 안 가지고 나가 현지에서 빌려 치는 골퍼는 이보다 더 많다.
문휘창 교수는 “수입 고가품 사용에 대한 지나친 반감도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으로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등 선진국이 수입자동차 등에 대한 거부감을 무역장벽으로 규정, 통상협상에서 한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작년 한 해 동안 승용차 가전제품 의류 골프용품 담배 주류 등을 수입하는 데 쓴 외화는 37억7700만달러로 휴대전화 수출액의 61.6% 수준이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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