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영/日 개방 FTA보다 급하다

  • 입력 2002년 3월 24일 18시 25분


이번 한일정상회담의 의의는 월드컵축구경기대회 공동개최의 기회를 이용해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 파트너십으로 발전시키자는 데 두 정상이 합의한 것이다. 일본의 고교 역사교과서 문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신사참배 문제 등 과거사 문제로 소원해졌던 한일관계를 월드컵대회의 성공적인 공동개최를 통해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로 전환하자는 계획이다.

이러한 계획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한일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노력을 가시화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 정상은 업계, 정부, 학계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산관학(産官學) 공동연구회를 발족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양국의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미 한일 FTA에 대한 공동연구를 수행해 긍정적 결론을 제시해 놓은 상태다. 따라서 이번 공동연구회 발족의 의미는 정부가 한일 간의 FTA 논의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수순을 밟음으로써, 한일 FTA 체결을 위한 정부간 협상에 들어갈 준비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일 ´과거사´먼저 해결해야▼

오늘날 지구상에는 수많은 지역 경제협정들이 체결돼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럽연합(EU)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다. 세계 경제의 두 중심지가 지역협정으로 뭉쳐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또 하나의 중심지로 떠오른 동아시아 지역은 지역 전체를 망라하는 지역협정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결성돼 있고, ASEAN과 한중일 사이에 이른바 ‘ASEAN+3’이 설립되어 지역 경제협력을 위한 논의의 장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또 최근 일본이 싱가포르와 FTA를 체결했고, 중국이 ASEAN과 2010년까지 FTA를 체결하기로 합의한 정도가 동아시아 지역경제협력의 전부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일 간의 FTA 체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한일 FTA는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지역 경제협력의 중심축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은 역시 동북아 3국이다.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 숫자는 많지만 경제 규모 면에서 동북아와 비교가 안 된다. 한일 FTA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참여를 유인해 동아시아 지역 전체를 망라하는 지역 경제협력체 건설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다. 즉, 한국과 일본은 미래지향적 FTA 체결을 통해 미래의 동아시아 질서 형성을 주도할 수 있다.

그런데 동북아 3국, 특히 일본과 중국은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묘한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 일본경제는 비틀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규모나 발전수준에서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당연히 자국 중심의 동아시아 지역 경제협력의 구상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개도국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급속한 성장을 통해 동아시아 경제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중국은 자국의 지방들을 동북아와 동남아 국가들과 연계시켜 자국의 발전과 더불어 자국 중심의 동아시아 경제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일단 일본과의 FTA를 통해 중국의 참여를 유인함으로써 한중일 경제협력체 건설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경쟁구도 속에서 일본이 한국과의 FTA 체결을 성사시키고, 중장기적으로 동아시아 지역 경제협력을 리드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변화를 이룩해야 한다.

첫째, 과거사 문제의 해결이다. 일본은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어두운 과거를 짊어지고 있다. 주변국들은 여전히 일본의 의도와 능력에 의구심을 갖고 경계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의 미래를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일본으로 거듭날 때에만 한일협력,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협력을 리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수요중심지 돼야▼

둘째, 일본은 국내시장의 획기적인 개방을 통해 동아시아 상품의 수요 중심지로 탈바꿈해야 한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수출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해 오고 있다. 국내에 전방위 산업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보이지 않는 수입규제들을 통해 외국상품의 유입을 억제해 오고 있다. 이러한 모습으로는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다. 물론 동아시아의 수요 중심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뼈저린 경제구조조정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중상주의적 제도와 관행, 국민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일 FTA 논의는 일본의 이러한 거듭남과 더불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국제관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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