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모방 범죄

  • 입력 2002년 3월 24일 18시 26분


첫 번째 작전. 검은 옷차림의 괴한들이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수도경비사령부 영내 헌병단의 높이 3m나 되는 블록담을 날렵하게 기어오른다. 그 위에 설치된 1m 높이의 철조망을 절단기로 자르고 가볍게 영내로 진입한다. 초병 2명에게 달려들어 흉기로 제압하고 K2소총 2정을 빼앗아 바람처럼 사라진다. 두 번째는 단독 작전. 역시 새벽에 담 밑에 있는 배수로를 통해 해병부대에 침투, 절단기로 탄약고 자물통을 부수고 실탄 400발을 훔쳐 유유히 사라진다.

▷작전은 계속된다. 이번에는 은행이 무대다. K2 소총을 든 괴한 3명이 이른 아침 출근하던 은행직원을 위협해 금고털이를 시도한다. 직원 중 한 명이 “강도야”라고 소리치며 달아나자 범행을 포기한 이들은 70여만원과 신용카드 등을 빼앗은 뒤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를 타고 현장을 떠난다. 영화 속 장면이라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모두 우리나라에서 최근 벌어진 실제상황이다. 어제 경찰이 검거한 은행강도 용의자 4명의 범행 스토리다.

▷대학 재학생 또는 휴학생인 이들은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가 주인공으로 열연한 할리우드 갱영화 ‘히트’를 보고 범행계획을 짰다고 한다. 자동차 구입 할부대금과 카드빚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학생 4명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방범죄의 나락으로 빠져 들었다니 안타깝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범죄와 폭력을 미화한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번 사건이 잘못된 사회 조류에 대한 경종이 되었으면 한다. 한 용의자의 경우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위해 군대에서 갈고 닦은 체력과 담력이 대담한 범죄의 토대가 됐다는 사실도 안타깝다.

▷‘접속의 시대’로 불리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혼자 살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심리학자 밴 듀러는 타인을 모델로 삼아 스스로 변해 가는 것을 모델링(modelling)이라고 부르면서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자신이 택한 모델의 영향을 받기 쉽다. 건강한 사회일수록 청소년들에게 닮아도 좋을 훌륭한 모델을 많이 제시한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본받을 만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지 걱정이다. 오히려 모방범죄를 권하는 병든 사회는 아닐까.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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