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창]박이문/쾌락만 추구하는 사람들

  • 입력 2002년 3월 29일 18시 27분


지금 우리는 무한경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개인이나 국가나 무한경쟁에서 이겨야 산다고 야단들이다. 누구나 바삐, 그리고 고달프게 산다. 그럴수록 모두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달프게 사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조용히 쉬면서 느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일찍이 “인간에게는 열정 없이, 할 일 없이, 오락거리도 없이, 바쁜 일 없이 완전한 휴식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다”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시간을 갖기보다는 바쁜 시간을, 휴식보다는 일을,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보다는 자기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한 정신적 집중을 더 원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파스칼의 통찰이 옮음은 놀랍게도 정년퇴직자들의 경험으로 뒷받침된다.

▼파스칼, 휴식의 고통 설파▼

정년퇴직은 퇴직자 당사자에게 경제적 수입의 축소, 신체적 황혼, 그리고 마침내는 죽음 등 부정적인 측면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일에 동반되는 육체적 및 심리적 고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휴식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큰 것 같다. 경제적 수입 측면은 별도이지만, 늙음이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면 이성적으로 볼 때 정년퇴직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적 걱정이 전혀 없는 사람들조차도 정년퇴직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정적 이유로 할 일이 없을 때 즉,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때의 고통을 든다. 파스칼의 관찰대로 인간은 휴식, 즉 자유시간을 찾는다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가 진짜로 추구하는 것은 소란뿐이다. 어째서 그럴까.

파스칼의 설명은 대략 이렇다. 어떤 한 대상에 대한 정신적 집중은 우리들 자신에 대한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자유나 휴식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로부터의 해방,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들 삶의 의미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정지 혹은 마비다. 달리 말해서 인간이 가장 피하고자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왜 그런가.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은 절대적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만 하고 의지할 곳 없으며 그 삶은 무의미하고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신의 비극적이고 비참한 존재 조건을 액면 그대로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가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을 위안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락뿐이라고 파스칼은 주장한다. 오락의 기능은 한 인간으로부터 그의 정신을 빼내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오락 행위에 정신을 뺏김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위장하고 또 거기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겉말과는 달리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일을 갖고 바쁘게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년퇴직자들이 직장을 떠난 후의 한가한 생활을 두려워하는 것도 파스칼 식으로 설명된다. 그것은 자신의 참된 정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던 현직시절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락은 일종의 방심의 기술이며,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기만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오락은 인간의 근본적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잠정적 도피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비극적이고 비참한 존재 조건으로부터 눈을 돌리려고 오락에 빠지면 빠질수록 인간은 더욱 더 깊은 비극적 늪에 빠져들어 가게 된다고 파스칼은 강조한다.

▼오락은 정체성 기만행위▼

오늘날 첨단과학기술로 불붙은 변화의 물결이 불과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눈부신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고,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혹은 공장에서 날로 바쁘게 살아간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날로 더 골프장에서, 유흥가나 관광지에서, 운동경기장이나 대중음악회에서 오락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집에서 가만히 혼자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몰려다니고, 부산을 피우며 떠들썩하게 산다.

파스칼의 눈으로 볼 때, 이 같은 삶의 양식은 오늘날 우리들 자신을 속이면서 내면적 성찰없이 건성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파스칼의 말대로 우리는 절벽이 보이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놓은 다음 위험한 줄 모르고 절벽으로 달려가고 있는 셈이 아닐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물음이다.

박이문 미국 시몬스대 명예교수·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