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이라도 집을 사둬야 할 것 같은데….”
‘청약신드롬’이 일고 있다. 2일 접수한 서울 3차 동시분양 평균 경쟁률은 79.8 대 1. 사상 최고 수준이다. 2월 말 현재 청약통장 가입자 수도 400만명을 돌파했다. 20세 이상 성인(2000년 11월 1일 현재 3265만4949명) 8명 가운데 1명이 청약통장을 갖고 있는 셈이다.
▽나는 청약한다, 고로 존재한다〓강남 모델하우스에는 ‘청약족(族)’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부동산개발업체 유리츠의 강형구 사장은 “모델하우스를 열 때마다 매번 찾아오는 그룹이 있다”며 “이들의 부동산 지식은 전문가 뺨칠 정도”라고 전했다.
청약통장 암거래도 극성이다. 남의 통장을 사서라도 아파트를 신청하려는 수요 때문이다. 전용면적 25.7평 이하 아파트에 지원할 수 있는 300만원짜리 통장의 프리미엄은 400만원(원금 제외)에 달한다.
이들은 모두 아파트 시세차익을 노린 ‘부자아빠’ 희망생들일까. 전문가들은 과거 청약 참가자들은 내집 마련과 투자수익을 노렸으나 최근에는 ‘나만 뒤질 수 없다’는 집단불안증세까지 보인다고 말한다.
▽확률 0.66%에 도전〓작년에 서울 동시분양에 나온 아파트는 2만7068가구. 청약예금과 청약부금 1순위자는 117만명. 당첨확률은 2.3%에 그친다.
청약통장 3순위자도 잠재청약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첨확률은 0.66%로 줄어든다. 여기에 청약이 집중되는 강남일대 아파트로 대상을 좁히면 확률은 0.2%대까지 떨어진다. ‘청약통장〓복권’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는 가능성도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강남에서 분양되는 20평형대 아파트값이 3억2000만원을 넘어섰다. 입주 후 값이 더 오를지는 미지수다.
▽‘자기존경욕구’의 전염?〓악조건에도 아파트청약 수요가 몰리는 데 대해 마케팅전문가들은 ‘자기존경욕구와 생존욕구’로 설명한다.
자기존경욕구는 남들이 나를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자부심을 갖기를 원하는 것. 생존욕구는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을 뜻한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재문 부연구위원은 “최근에는 자기존경욕구가 생존욕구에 우선한다”고 분석했다. 서울 강남지역과 강북지역의 집값 격차가 커지면서 강북거주자의 자기존경욕구가 훼손되고 있어 강남아파트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는 강남이 하나의 브랜드로 정착한 때문이기도 하다. 옷이나 가전제품 소비가 브랜드에 의해 좌우되듯 아파트도 ‘강남표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서울, 특히 강남을 대신할 뚜렷한 대체재가 없다는 점도 부수적 요인이 된다.
김 연구위원은 “자기존경욕구는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에 전염된다”며 “이에 따라 너도나도 아파트시장에 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페르소나에 대한 동일시?〓최근의 청약열기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한 시도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 김정일 박사는 이를 ‘페르소나(Persona)에 대한 동일시’라고 진단했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배우가 썼던 가면. 심리학에서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김 박사는 “유행에 민감하고 앞뒤를 재지 않는 소비심리와 지위상승 욕구가 페르소나에 대한 동일시”라며 이는 모방소비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남들이 청약하는데 나라고 뒤질 수 없다는 것.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획일성에 대한 집착으로 구체화했다. 권 교수는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결과의 획일성’에 익숙해 있다”며 “다른 사람이 집을 사면 나도 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설명했다.
획일화된 사회의 구성원들은 표준에서 비켜나면 심리적 불안에 시달린다. 최근 청약열기도 집값 상승의 수혜자 대열에 포함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심리를 반영한다고 분석이다.
권 교수는 특히 “정부정책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해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대책을 내놓아도 이를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구성원들은 ‘다른 무엇’에 집착하게 되며 집착의 대상은 바로 아파트라는 것이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