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축구]최화경/악마 공방

  • 입력 2002년 4월 3일 18시 11분


1983년은 한국축구엔 잊을 수 없는 해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홈팀 멕시코와 호주 우루과이 등 내로라 하는 강팀을 차례로 꺾고 4강까지 오른 게 바로 이 해다. 월드컵대회까지 개최하게 된 요즘이야 다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축구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런데 초반에 지고 보따리를 쌀 줄 알았던 한국팀이 연일 돌풍을 일으키니 뉴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이때 각 국 취재진들이 한국축구에 붙인 별명이 유니폼 색깔을 딴 ‘붉은 악령(Red Furies)’이었다. 그리고 그 뉘앙스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우리 취재진이 약간 바꿔 국내에 타전한 게 바로 ‘붉은 악마’다.

▷어느 스포츠 현장이든 응원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축구의 경우는 유별나다. 특히 유럽이나 남미의 극성팬들은 자기나라 대표팀이 하는 경기면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응원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축구사랑이 지나치다 보니 악명 높은 훌리건까지 나왔을 게다. 요즘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일본엔 ‘울트라 닛폰’이 있고 미국엔 ‘샘의 군대(Sam’s Army)’, 중국엔 ‘추미(蹴迷)’가 있다. 우리는 ‘붉은 악마’가 국가대표팀 공식응원단이다. 팬들이 4년 전 PC통신을 통해 응원동아리를 만들고 거기서 토론을 거쳐 확정한 것이라고 한다. ‘멕시코 4강신화’를 떠오르게 하는 기분 좋은 이름이 아닌가.

▷이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악마라는 단어가 한국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고 포악성과 사악함을 상징한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이 때문에 공청회도 열렸고 서명운동까지 벌인다는 얘기다. ‘붉은 악마’ 대신 ‘붉은 호랑이’ ‘붉은 동자’ ‘붉은 황소떼’로 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엊그제에는 교계가 주축이 된 ‘붉은 악마 응원단 명칭변경추진위원회’가 기도회까지 열었다니 건성으로 넘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악마라는 단어 자체는 물론 좋은 뜻이 아니다. 그러나 힘과 꾀를 애교 있게 표현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벨기에 대표팀과 영국 프로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붉은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리지 않는가. 또 연인끼리 상대방을 부르는 애칭인 ‘귀여운 악마’에도 진짜 악마다운 의미는 없다. 마찬가지로 ‘붉은 악마’를 치열하고 집요한 응원의 상징이라고 좋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제 월드컵이 코앞이다. 응원단 이름을 놓고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 어떻게 한 마음으로 응원하느냐를 놓고 머리를 맞댈 시점이다.

▷악마라는 단어는 종종 그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치열한 승부근성과 집요한 플레이를 상징한다. 벨기에 대표팀과 영국 프로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붙은 ‘붉은 악마’라는 별명도 이러한 의미다. 또 연인끼리 상대방을 부르는 애칭인 ‘귀여운 악마’에는 사랑이 넘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붉은 악마’를 뜨거운 응원의 상징이라고 좋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제 월드컵이 코앞이다. 응원단 이름을 놓고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 어떻게 한마음으로 응원하느냐를 놓고 머리를 맞댈 때다.

최화경 논설위원 bb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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