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대녕이 하동 쌍계사에서 벚꽃 통신을 전해왔다. 섬진강 자락을 끼고 십여 리 이상 난분분한 황홀경을 연출해내는 그 군락을 이번 주 넘겨 제대로 만끽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언이었다. 나는 이번 주중에 그곳을 찾으리라 다짐하며 지난 주말 김훈의 집을 방문하였다. 현관에는 흙을 켜켜이 껴입은 자전거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자전거 여행’을 집필하고 새로 마련한 것이었다.
‘자전거 여행’(생각의나무·327쪽 9000원)은 제목 그대로 ‘풍륜(風輪)’이라는 산악자전거를 파트너로 삼은 김훈의 기행산문집이다.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을 동행한 ‘풍륜’은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는” 여행의 속성을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풍륜’과 동행하는 여행은 철저하게 몸을 부려내는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자동차의 엔진에 몸을 편안하게 의탁하고 눈의 즐거움만 좆기 쉬운 우리네 여행과 대별되는 것이다. 남성적 힘이 주도하는 여행에서 그의 몸과 산악자전거는 거의 동성애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산악자전거에 들러붙은 몸의 지체들은 산천의 풍경을 절실하게 만끽하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이번 주에 남도의 꽃잔치에 참여하려는 계획을 세운 나로서는 그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도 봄 풍경의 체험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훈은 우선 남도 봄 풍경의 배경으로 황토를 들어앉혀 놓는다. “황토는 남도의 봄이 펼쳐내는 모든 색깔 중에서 가장 깊다”고 그는 말한다. 황색보다 적색에 가까운 그 빛깔을 ‘가장 깊다’고 주장한 까닭은 핏빛 고통의 자취가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황토는 한으로 생명력을 일구어내는 삶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훈이 황토에 부여하는 미학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황토가 빚어내는 밭두렁의 형상에 주목한다. “밭들의 두렁은 기하학적인 선을 따라가지 않고, 산비탈의 경사 각도와 그 땅에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의 인체공학의 리듬을 따라간다. 그래서 그 밭두렁은 구불구불하다”는 것이다. ‘구부러진 밭두렁’의 미학은 배척하지 않고 껴안는 생명의 리듬을 간직하고 있다. ‘밭두렁’의 곡선이 간직한 생명의 리듬은 남도 무등산의 형상과 속성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 산은 사람을 찌르거나 겁주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 혹은 “산이 세상을 안아서, 산자락마다 들과 마을을 키운다”고 김훈이 규정할 때, 무등산은 “구부러진 밭두렁”의 형상을 모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뿐이랴. ‘구부러진 밭두렁’의 형상은 무등산뿐만 아니라 섬진강의 흐름으로 면면히 이어져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구례에서 화개에 이르기까지 861번 지방도로를 김훈처럼 산악자전거로 달리지는 못하더라도, 자동차와 도보에 몸을 싣고 눈으로 마주치는 봄 풍경은 구불구불한 섬진강을 배경으로 피어난 산수유와 벚꽃으로 그득할 것이다. 다만 그 꽃잔치에 동반자 없이 참여해야 하는 신세가 처량할 따름이다.
이경호 문학평론가 segyesa@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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