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그 때 그 이야기]제3회 프랑스 대회<상>

  • 입력 2002년 4월 8일 17시 55분


1938년 프랑스월드컵 결승전에 앞서 伊 주장 메아차(왼쪽)와 헝가리의 주장 사로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38년 프랑스월드컵 결승전에 앞서 伊 주장 메아차(왼쪽)와 헝가리의 주장 사로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38년 제3회 월드컵은 출발 전부터 삐걱거렸다.

개최지 선정을 둘러싼 대립 끝에 보이코트 사태까지 빚어진 것. 당시 대회 유치 경쟁에는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유럽과 남미를 각각 대표해 뛰어들었다. 유럽세는 아르헨티나에서 열릴 경우 장거리 이동에 어려움이 많다는 ‘실리론’을 들었다. 반면 1회 남미(우루과이)-2회 유럽(이탈리아)의 전례를 볼 때 3회 대회는 당연히 아르헨티나에서 열려야 한다는 것이 남미세의 ‘원칙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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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대륙의 이해가 팽팽히 맞선 가운데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에서 프랑스가 개최지로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FIFA 회원국의 대다수가 유럽국가였고 프랑스 출신 줄리메 FIFA 회장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월드컵 유치에 실패한 아르헨티나는 강력히 반발하며 출전을 거부했다.

잡음 끝에 개최지가 결정된 제3회 프랑스월드컵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다. 스페인은 내전에 시달리며 대회에 나설 수 없는 상황에 빠졌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 유럽에 전운이 가득했던 것. 독일에 강점된 오스트리아는 예선을 통과하고도 본선에 참가할 수는 비운을 맛봤다. 우루과이는 자국에서 열린 1회 대회 때 대부분 유럽국가가 출전하지 않은 데 대한 항의 표시로 출전하지 않았고 잉글랜드도 불참 대열에 합류했다.

16개 본선 진출국 가운데 비유럽국가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출전한 브라질과 쿠바 네덜란드 령 동인도(인도네시아) 등 3개국뿐이었다. 월드컵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유럽 잔치’로 전락한 셈.

처음으로 개최국과 전 대회 우승국에게 본선 자동 출전권이 주어진 이 대회에서는 15개국이 우승을 다퉈 이탈리아가 결승에서 헝가리를 누르고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정치 논리와 대륙 이기주의에 얼룩진 월드컵은 3회 대회를 치른 뒤 제2차 세계대전의 태풍에 휘말려 1950년 브라질월드컵 때 까지 12년 동안 중단되는 ‘월드컵 암흑기’에 접어든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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