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프린스턴 대학 교수들이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동료 교수에게 존경의 표시로 자신이 쓰던 만년필을 헌정하는 장면이 두 차례 나온다. 20대에 천재적인 논문을 발표한 뒤 정신분열증에 걸려 잊혀졌다가 60대에 노벨상 후보에 오른 내시 교수의 테이블에 교수들이 줄지어 만년필을 올려놓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美대학 총장 선임 까다로워▼
미국 명문 대학들은 학교를 알리는 홍보물에 반드시 노벨상 수상 교수 수를 자랑으로 내세운다. 하버드 대학은 전현직 교수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39명으로 이 분야에서도 으뜸이다. 연구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는 우리로서는 교수진에 노벨상 수상자가 점점이 박혀 있는 미국의 명문 대학들이 부럽기만 하다.
최근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차기 총장 선거운동이 과열돼 식사 접대, 학연 지연 편가르기 등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식집에서 생선회를 사는 교수는 당선되고 설렁탕을 사는 교수는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도 술 사주고 밥 사주는 운동을 하다가는 형사처벌을 받고 당선되더라도 의원자격이 상실되는데 대학 총장 선거에는 당선무효도 없다.
하버드 대학이 대학 총장을 선임하는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과정을 살펴보면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것만으로 세계 최고 대학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0년 6월 닐 루딘스타인 전 총장이 1년 후 퇴임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하버드 대학은 제27대 총장을 찾는 절차를 개시했다. 재단 이사 등으로 총장추천위원회가 구성돼 30만에 달하는 교직원 학생 동문 그리고 정부와 비영리단체에 차기 대학 총장감이 지녀야 할 자질과 능력에 대한 의견과 함께 총장 감을 천거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총장추천위원회는 교수, 단과대학 학생대표, 대학원생 대표들을 불러 차기 총장감에 대한 견해를 경청하고 다른 경쟁 대학의 교직원들까지 만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압축된 500명가량의 후보 중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힐러리 상원의원, 해럴드 바머스 전 국립보건원 원장, 로런스 서머스 재무부 장관이 포함됐다. 최종 낙점은 재단과 하버드 대학 학위 소지자들로 구성된 감독위원회가 한다.
서머스 총장은 취임 후 하버드 대학이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에서 학부생들이 필요로 하는 교육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진단을 내리고 구성원들에게 인기가 없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웬만하면 ‘B’를 주던 학점 관리를 엄격히 하고 교수들이 학부 학생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장려한다. 또 의학분야와 생명과학 분야의 특장을 살려 하버드 대학이 자리한 케임브리지와 보스턴을 제2의 실리콘밸리로 만드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 대학 총장들은 기부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전화통에 매달리고 모금파티하느라 영일이 없다. 하버드 대학은 연간 기부금이 180억달러를 넘는다. 공직 경력이 다채로운 총장이 내부 교수 중에서 뽑힌 도토리 총장보다는 모금 실적이 우수할 수밖에 없다.
한국 대학들이 총장을 교수들의 손으로 뽑는 선거제도를 채택한 것은 1987년 6·29 이후 자율과 민주화의 물결이 사회 각 분야에 분출하던 시기였다. 총장 직선제가 대학 사회를 개혁하고 민주화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직선제 이전에 국립대학 총장은 정치권에 줄을 댄 낙하산 인물로 채워졌고 일부 사립대학에서는 비리 재단과 총장의 전횡으로 분규가 그치지 않았다.
▼총장직선제 정치권 닮아가나▼
그러나 지금은 총장 직선제가 대학 사회에 적지 않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 선거에서 이긴 쪽은 대학의 보직 자리를 전리품으로 나누어 갖고 혜택을 받지 못한 교수들은 총장 임기 내내 대학 안에서 야당을 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짝 짓기와 패 가르기를 통해 당선된 총장은 안으로는 구성원들의 고통을 필요로 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힘들고 밖으로는 폭넓은 활동을 통해 학교 발전을 위한 대외적 지원을 유치하는 데도 한계를 드러낸다.
보직을 추구하는 학내 정치 대신에 아름다운 정신이 빚어낸 연구 업적에 대해 존경을 바치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우리도 연구 분야에서 노벨상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