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경준/˝행정지도=마약˝

  • 입력 2002년 4월 9일 18시 25분


1일 서울시는 주택건설업체가 아파트 분양가를 과다하게 책정하는 경우 각 구청의 ‘행정지도’를 통해 분양승인을 내주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며칠 뒤에는 오피스텔 난립을 막고 가격거품을 잠재우기 위해 교통영향평가를 강화하고, 사전분양도 일절 금지한다는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 역시 수단은 법에 근거가 없는 ‘행정지도’다.

행정지도의 사전적 의미는 ‘행정기관이 행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규제, 유도의 수단으로 행정객체에 협력을 구하는 일’. 그러나 각종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행정기관의 뜻을 민간이 거스르기는 힘든 터라 행정지도는 다분히 강압적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아무리 서민들의 내집 마련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좋은 취지라 하더라도 행정지도는 그 속성상 남발될 경우 ‘필요악’을 넘어 ‘해악’이 될 수 있다. 더구나 뚜렷한 기준 없이 담당 공무원의 상식과 재량에 맡겨진 행정지도는 거의 대부분 원성을 사게 마련이다.

아파트 분양가 규제만 해도 그렇다. 다음달 초 청약하는 서울지역 4차 동시분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시는 아직까지 아무런 잣대도 마련하지 못했다.

한 건축업자는 “구청에 따라, 공무원에 따라 어느 정도가 ‘과다한 지, 적정한 지’ 제각각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 재량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대우사태’로 금융시장이 출렁이던 99년. 금융당국은 주가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증권사, 투신사에 “팔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사장들을 불러모아 ‘매도 자제’를 결의하도록 압박하기도 했다. 행정지도였다. 그 덕에 당장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금융기관은 펀드의 수익률이 떨어져 소송에 휘말렸고, 자체보유 주식도 휴지조각으로 변해 만신창이가 됐다.

당시 ‘행정지도의 대가(大家)’를 자처했던 금융당국의 간부는 한참 뒤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정지도는 마약과 같습니다. 제일 쉽고, 간단하고, 효과도 확실하지만 남발하면 온 몸을 썩게 만들지요.”

정경준 사회2부 news9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