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치에 대한 논의는 이제 강대국들간의 마찰이 아니라 국제적 테러리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역적 마찰(특히 동남아시아 지역)도 일단 9·11테러의 후유증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우 복잡하고 구체적인 지역적 원인들에 의해 발생되고 있는 마찰과 갈등을 9·11과 연관해 분석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유용할까.
▼정부-반군 6년째 내분▼
네팔의 예를 보자. 14만1000㎢ 면적에 인구 2400만명인 네팔은 1996년부터 테러리스트라고 불려온 게릴라 반군들의 저항으로 인해 3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냉전 종식으로 소수의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한 모든 공산체제가 붕괴했지만 남아시아는 상당수의 지역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명맥을 유지해 왔다.
네팔은 1990년 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한 이후 자유로운 정치운동이 보장되자 네팔 국회당과 마르크스-레닌당이 정치권에 부상했고 94∼95년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카트만두 지역의 리더로 정권을 이끌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네팔인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줬다.
부패와 행정 실패가 만연했고 네팔정부의 리더십 부재로 정치적 혼란과 내분이 가중돼 왔다.
1996년까지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돼 왔던 마오쩌둥 네팔 공산당은 의회 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정부에 대항, 민중전쟁을 선포했다. 인구의 80%가 농업에 의존하는 국가로 가난에 찌들어온 서민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마오쩌둥 공산당의 주장에 호응하며 이들을 지지해 왔다. 한편 마오쩌둥 반군들은 테러리스트적 방법을 동원, 지방 경찰, 단체들을 선동하고 지역 지주들과 관료들을 추방하거나 살해하기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83년부터 중국에서는 정작 마오쩌둥주의가 이미 한물간 사상으로 인식돼 왔다. 중국정부 역시 네팔의 현 상황에 대해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카트만두 지역에서의 마오쩌둥 반군 대처는 정부군 대신 지역 경찰들에게 맡겨져 왔다. 정부가 개입할 경우 내전으로 사태가 확산될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우쩌둥 반군들의 세력이 확장되자 정부군은 매우 급진적인 협상에 합의하느냐 내전을 치르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부의 정치체제 기반은 네팔 왕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약해졌고 얼마 전 네팔 왕자의 왕족 살인사건으로 인해 더욱 악화됐다. 정부는 게릴라군들과의 휴전을 제의했고 이후 세 차례 협상이 이뤄졌다. 그러나 마오쩌둥 반군이 급진적인 국가 건설을 제의하는 입장에서 후퇴하지 않자 결국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네팔 정부는 2001년 11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수많은 언론인과 마오쩌둥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정부군은 5000여명의 반군을 체포하기 위해 전국에 배치 됐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는 마오쩌둥군의 지지기반이 돼온 농민들과 서민들의 쌓여온 울분을 풀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농지개혁정책과 힌두체제 시스템에 대한 개혁 정책 등이 그 예다.
장기적인 결과가 어쨌든 군사력을 동원함으로써 네팔 내분은 더욱 격심해졌고 경찰 군인 등 129명이 살해됐다. 이후 62명의 반군이 정부군의 소탕작전으로 살해됐고 관광업 등을 위시한 네팔의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9·11 후유증과는 관련없어▼
여기서 살펴봐야 할 문제는 과연 네팔의 지속적인 테러 캠페인과 워싱턴이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의 연관성이다. 네팔의 반란은 오래된 내분과 갈등 때문이며 국제적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미국은 2월 알 카에다와 마우쩌둥 반군을 나란히 비교하며 네팔정부에 군사력을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네팔의 문제는 언론을 통해 단순하게 다뤄지는 국제정치의 맥락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네팔의 현실을 9·11테러와 연관시켜 분석하는 것은 마치 냉전시절 중동지역의 상황을 미국과 러시아간의 마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분석했던 오류와 같다.
이 같은 단순한 분석의 틀은 잘못된 인식과 함께 중동지역을 비롯한세계 정세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제임스 코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국가방위아카데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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