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12일 독일 ZDF TV.
‘문학 4중주’ 프로그램을 마친다는 진행자의 인사말이 흘러나오자 방청석에 앉은 청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거실의 안락한 소파에 앉아있던 시청자들도 자세를 고쳐앉으며 진행자석의 노신사에게 경의를 표했다.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13년간의 ‘문학 4중주’ 진행을 마치고 시청자의 시선 밖으로 퇴장하는 순간이었다.
‘문학 4중주’는 독일 출판가의 전설이었다. 방송 4주 전 ‘다음에 소개될 책’들이 예고되면, 해당 서적은 당장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서점들은 허겁지겁 ‘문학 4중주 코너’를 고쳐 꾸미기 바빴다.
그러나 독일 문화계에서 라이히-라니츠키가 갖는 위상은 단순히 ‘인기 프로그램을 이끄는 출판계 권력’에 그치지 않는다. 방송 시작 이전 그는 이미 독일 최고 권위의 신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학부장을 16년 동안이나 맡아온, 독일 비평계의 신화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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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영혼’(원제 Mein Leben·나의 생애)은 바로 그 라이히-라니츠키가 1999년 내놓은 자서전. 1년을 한주 넘겨 53주 동안 ‘슈피겔’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세계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책의 내용이야 뻔할지도 모른다. ‘흠, 독일 현대문학의 거장들 얘기가 펼쳐지겠지. 그들 작품을 추어올리기도 하고, 은근슬쩍 꼬집기도 하고 말야. 사적인 교유의 기록도 집어넣어 말랑말랑하게 꾸몄겠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533쪽에 달하는 책 중 349쪽 이후의 ‘부분적 진실’일 뿐이다. 저자는 이 두꺼운 책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유력 언론들의 서평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 “이 책은 홀로코스트 문학의 잊혀질 수 없는 걸작이다.”(더 타임스)
그가 식당에 들어가면 악사들이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전형적 유태인임을 드러내는 용모 때문. 그 얼굴로 그는 2차대전의 한가운데를 헤치고 살아남았다.
폴란드 시민으로 출생했지만 부모는 독일적 교양을 몸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베를린으로 떠나게 되자 담임선생은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너는 문화의 나라로 가는구나.”
1938년, 그는 열차에 실려 폴란드로 추방됐다.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뒤 바르샤바의 유태인을 몰아넣은 악명높은 ‘바르샤바 게토(유태인 격리구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가스실로 가는 줄에서 부인의 손을 잡고 탈출한다.
농가에 은신해 종전을 맞은 뒤 폴란드군 장교로, 런던주재 영사로 변신. 숙청된 뒤 복권됐지만 1958년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탈출한다. 목숨을 건 두 번째 탈주였고, 독문학자 겸 문학평론가 라이히-라니츠키의 일생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평생 문학을 붙잡고 씨름한 백전노장이 이 파란만장한 생애를 건조한 문체로 써내려갔을 리 없다. 매일 노상에서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굶어죽어가는 게토의 한 언저리에서 조직된 오케스트라. 음악가들은 훗날 전원 가스실에서 생을 마쳤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연주를 회상하는 작가의 눈에 눈물이 비치는 듯 하다.
“독일군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내는 내 옆에 서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똑같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자 시커먼 먹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비평가이며 교육자이자 흥행사이다.” (프로스펙트)
폴란드생활 말년인 1958년, 그는 작가라고 자칭하는 한 서독 젊은이의 안내를 마지못해 맡게 된다. 당당한 콧수염과 사나운 눈빛을 한 그 젊은이는 “무엇을 쓰고 있느냐”라는 물음에 “정신병원에 수용된 난쟁이 꼽추 얘기를 쓰고 있다”고 대답한다.
젊은이는 41년 뒤 노벨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 난쟁이 꼽추의 얘기란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 ‘양철북’이었다.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공언한 페터 한트케, 문학에 대한 이해보다 조직력과 권력욕이 뛰어났던 한스 베르너 리히터…. 친구들은 그의 비평 대상이었고 또한 그의 적이기도 했다.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그를 움직인 원칙은 한결같았다. 뛰어난 텍스트의 해석능력과 더불어 그것은 그를 비평계 황제로 등극시킨 동력이었다.
“우정에 매수당해서는 안된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썼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그가 호색한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평범한 유럽 남성이 평생 겪을 수 있었던,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연애담을 허식 없이 털어놓은 것 뿐. 결혼 후에 진행된 것도 제법 있다. 공통점이라면, 모든 ‘로망스’ 혹은 ‘스캔들’이 문학을 매개로 해서 진행됐다는 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학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라는 그의 고백은 이성관계에도 들어맞았다.
평론문에 스탈린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듭 그를 사무실로 불러들인 폴란드인 여자 편집장, TV 토론에서 그만 마음을 빼앗아버린 여인…. 어쨌던 모든 사건을 ‘문학’이 중재했던 것이다.
마지막 사랑 이야기는? 책의 끝부분에 등장한다. 99년, 시집을 읽고 있는 여인을 향해 노대가가 다가간다. 여인은 나치 점령하의 바르샤바에서 괴테와 호프만시탈을 함께 읽었던 그 사람이었다.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해온 평생의 동반자, 토지아 라이히-라니츠키. 80세의 생일을 맞은 여인에게 그는 예의 호프만시탈의 시구를 건넨다.
‘꿈이야, 현실이 아닐 거야/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연보
1920
폴란드 블로츨라베크에서 출생
1929
베를린으로 이주
1938
나치에 의해 폴란드로 추방
1940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됨
1943
아내 토지아와 함께 가스실행 직전에 탈출. 부모 형제는 피살
1948
런던 주재 폴란드 영사로 근무
1951
문학관련 자유기고가 활동 시작
1958
독일여행(부인 아들은 런던여행)후 귀국 거부, 독일 시민권 획득
1960
‘차이트’ 지 고정 비평가
1968
미국 세인트루이스워싱턴대 객원교수
1973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문학부장
1987
토마스만 상 수상
1988∼2001
ZDF방송 ‘문학 4중주’ 프로그램 진행
2002
ZDF 새 프로그램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솔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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