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의문과 베일에 쌓여 있던 가야사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가야문화권에 대한 광범위한 지표조사 결과 종전에 막연히 생각해 왔던 가야의 지역적 실상들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서 가야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현란한 유물이 출토될 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것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은 부정되었다’라는 논조였다. 가야지역에 대한 일본측의 전통적 역사관에 대한 잠재적 불만의 표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야사에 대한 왜곡되고 부정적인 역사관은 일본의 고문헌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초한다. ‘일본서기’는 8세기 일본의 천황제 율령국가의 수립 후 천황통치의 유구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편찬한 사서다. 거기에는 가야를 비롯한 고대의 한반도제국을 일본의 번국 내지는 조공국으로 보는 대외관념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이런 역사인식은 시대적으로 계승됐고 근대에 들어서는 한국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된다.
황국사관에 대한 학문적 비판이 가해진 1945년 이후에 있어서도 가야사를 보는 일본측 시각은 변하지 않는다. 일본학계에서 고대 한일관계사의 ‘명저’이자 ‘통설’로 통하는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1949)는 가야의 흥망사를 다루면서 가야를 고대 일본의 종속국으로 보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다. 최근의 일부 일본 역사교과서에 반영된 임나일본부설의 망령도 이런 역사인식과 연구경향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김태식 교수(홍익대 역사교육과)의 저서는 왜곡되고 훼손된 가야사를 바로잡고 한국고대사 속에서의 가야사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고자 저술된 것이다. 저자가 서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올바른 가야사의 복원이야말로 임나일본부 혹은 남선경영론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국시대에 가야를 포함시켜 4국시대로 규정, 가야를 한국고대사 체계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전제하에서 서술된 이 책은 모두 3부작의 3권으로 편집된 9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술이어서 접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제1권은 가야의 시대사에 대한 서술이다. 가야사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개념들을 정리하고, 4세기말을 전후로 전기가야사, 후기가야사를 구분하여 그 사적 전개과정과 가야의 멸망원인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제2권은 ‘가야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라는 부제를 붙인 분류사다. 가야의 정치체제, 경제, 사회구조, 사상과 대외관계 등을 통해 가야의 사회상을 살피고, 가야의 지명과 관련된 학설을 검토하며 전 후기 가야의 영역을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논증했다.
제3권은 가야의 각국사에 대한 서술이다. 시기별 지역적 맹주국인 가락국, 반파국, 안라국의 성장과 발전과정을 논하고, 나아가 문헌상에 보이는 북부의 가야 12개국, 남부의 가야 15개국의 정치 문화적 실태를 밝혔다.
문헌사료의 광범위한 수집과 철저한 고증, 방대한 고고학적 자료의 분석, 가야문화권에 대한 답사를 통해 이룩한 이 저술은 가야의 역사, 문화, 사회, 지리, 사상, 대외관계 등이 총망라된 가야사의 종합이다. 저자의 20년 가야사 연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본서의 기본 골격과 관점은 10여 년 전에 출간된 저자의 연구서 ‘가야연맹사’(일조각·1993)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출간된 이 저서는 단지 옛 저서의 관점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더욱 세부적 실증적으로 구체화시켜 가야사의 시간적 공간적 영역을 넓히고 이해의 폭을 확대시키고 있다. 종전의 난해했던 서술을 알기 쉽게 풀어쓰고 각종 사진, 도판, 유물과 유적의 실측도, 지명고증도 등 400매가 넘는 방대한 보충자료를 삽입해 현장감을 높이고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개설서나 입문서로서의 성격에 머물지 않고 실증과 이론 양면에 걸쳐 광범위한 분야를 철저히 파헤쳐 나가고 있는 전문서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자칭 ‘가야 金’이라고 할 만큼 가야사에 대한 크나큰 애정과 열의를 갖고 한 분야만을 고집하고 외길을 걸어온 집념의 연구자다. 자연히 가야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그의 노력은 연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 자신이 내세운 4국시대론이나 전후기로 나눈 가야제국의 연맹체론, 가야사의 시간적 폭을 기원전 2세기말부터 562년까지 700여년으로 잡은 것, 가야의 공간적 영역을 경상남북도의 낙동강유역과 그 서부지역에서 최대 전라남북도 동부지역에까지 본 것은 가야가 결코 주변제국에 비해 뒤떨어진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전제들이다.
이런 전제들은 고대사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고 중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특히 4국시대론은 고대사학계 내에서는 ‘나홀로’의 목소리에 가깝다. 그러나 학계의 논쟁점들을 적극적으로 돌파해 나가려는 저자의 주장은 확신에 차있다. 자기 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방대한 업적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어차피 학설은 논쟁을 통해서 자극 받고 발전하는 것이다. 종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전문가와 일반 독자가 동시에 읽을 수 있는 가야사가 출간됐다는 것은 환영해야 할 일이다. 이 책에 나타난 저자의 입장이 분명해진 만큼 앞으로 학술적 논쟁은 재연될 것이다. 동시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가야사가 저자의 명쾌한 논리에 의해 일반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많은 부분들이 해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큰 의의를 갖는다. 이를 계기로 가야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독자층이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
연민수 동국대 사학과 강사·고대 한일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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