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밀로셰비치를 옭아맨 ‘정의의 덫’은 인류를 상대로 한 범죄를 일컫는 반인륜범죄(crime against humanity)였다. 역사는 밀로셰비치가 반인륜범죄는 국경에 관계없이, 시효에 상관없이 처벌받는다는 확실한 선례를 남긴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기록할 것이다. 집권기간으로 보면 밀로셰비치보다 한 수 위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도 비슷한 수렁에 빠졌다. 무려 17년을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피노체트는 98년 런던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돼 18개월간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밀로셰비치는 ‘인종청소’로 표현되는 이슬람교도 학살 등을 지휘했고, 피노체트는 수천 건의 살인 및 실종사건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반인륜범죄에 관한 한 2002년은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될 것 같다. 대량학살과 전쟁범죄 등 반인륜범죄를 처벌하는 최초의 상설 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ICC·Inter-national Criminal Court)가 7월 1일 출범하기 때문이다. 유엔의 한스 코렐 법률고문은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는 말로 ICC 출범의 의미를 표현했다. 상설기구가 만들어지면 반인륜범죄 처벌은 훨씬 쉬워진다. 밀로셰비치는 임시기구인 유엔 국제전범재판소의 기소에 의해, 피노체트는 스페인 검사의 국제 체포영장 발부에 따라 체포된 것이어서 어렵고 지루한 과정이 필요했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의 반대가 ICC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것 같다. 미국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ICC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에 서명했으나 조지 w 부시 정부는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민이 정치적 공세에 의해 기소되는 것을 우려해 반대한다지만 반인륜범죄에 대한 처벌을 모면하자는 속셈인 것 같아 씁쓸하다. 엄청난 범죄에 대해서도 인류의 생각이 모두 같지는 않은 것 같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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