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소설가는 요리책도 쓰고 방송 출연도 하며 인터넷 웹진도 발행하고 영화도 감독해야 한다.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교코’‘토파즈’‘래플스 호텔’등 자신이 쓴 소설들을 직접 감독해서 영화로 만든 무라카미 류는, 나처럼, 잡식성이며 탐욕스럽다. 그와 동세대이며 같은 ‘무라카미’성을 가진 하루키가 재즈 카페를 경영하고 비의적 문체로 삶의 초월적 영역을 탐색하고 있을 때, 류는 저자거리에 내려와 (아마도) 마약을 하고 SM(사도마조키즘)을 하며 고통스럽게 신음을 지른다. 그것이 삶의 포즈, 아니면 제스처일까? 나는 하루끼보다는 류에게서 더, 사람 냄새를 맡는다.
무라카미 류의 좋은 소설들은,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 혹은 화해 불가능한 세계의 비밀에 대해 끝없이 발언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때, 아직 가공되지 않은 사적 경험의 배설물들이 그대로 신체 밖으로 토악질되려는 본능을 제어할 수 있을 때, 완성된다. 데뷔작이며 24세의 그에게 아쿠타가와상을 안겨준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부터 ‘69’‘무라카미 류의 영화소설집’ 등은 류의 자전적 체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속에 함몰되지 않고 탄력적 거리를 유지하며 미학적 긴장을 빚어낸다. 그러나 류는 자신의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벗어난 ‘코인로커 베이비스’‘피지의 난쟁이’처럼 상상력의 힘만으로 세계에 대해 발언하기도 한다.
류의 소설들은 이처럼, 사적 체험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거나 혹은 허구적 영역을 상상력의 힘으로 재창조한 세계로 갈라져 있었는데, 최근의 작품들은 이 두 세계의 융합을 모색하고 있다. ‘타나토스’는 그의 전작인 ‘래플스 호텔’을 연상시킨다. ‘래플스 호텔’의 무대가 싱가포르라면 이번에는 쿠바인 점이 다르다. 그러나 역시 호텔이 주 무대로 등장하고 선형적 서사구조가 아닌, 현재에 의해서 과거의 단서들이 풀려 나간다는 점도 비슷하다. 역할은 조금 바뀌어져 있지만, 여배우 사진작가 여행가이드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것도 같다. 이런 직업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삶(혹은 풍경)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들을 한다. 결국 류 역시,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상처받고 있는 것이다.
|
‘타나토스’는 류의 문학적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는 소재 중의 하나인 SM을 통해서, 지배/피지배 가학/피학의 단순 대립 구도가 아닌, 진정한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들었던 매혹적인 쿠바 음악이 배경에 깔리고 있는듯한 ‘타나토스’에는, 제목 그대로 자신이 이미 죽음의 늪 속에 들어와 있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피폐한 영혼을 가진 여배우가 등장한다.
쿠바의 바라데로라는 관광지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여행 가이드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26세의 사진작가인 화자는, “나는 나의 착란을 정리하기 위해 쿠바에 온 거예요”라고 말하는 여배우 레이코를 만난다. 그 착란은 그녀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연출가 야자키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소설은 레이코와 야자키, 그리고 야자키의 여자 게이코와의 관계에서 레이코가 어떻게 상처 받았는지 혹은 그 상처를 받아들였는지를, 레이코의 두서없는 독백, 마치 ‘극적인 퍼포먼스이며 모놀로그’처럼 보여준다. 그들의 관계는 성적 가학과 피학의 롤 플레이인 SM을 통해서 드러난다.
“피지배자만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야기 하는 것은 노예나 환관이나 패배한 장병이나 피차별자나 약자나 마이너리티야. 약탈하고 죽이고 범하는 원시적인 수렵민이나 기마 민족에게는 이야기가 없어.” “(그들은) 기본적으로 변명이 필요했고, 그 변명으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놈들이야. 그것이 언어의 기원이라고 생각해. 이야기의 기원이기도 하고. 그것 자체로 마조히즘이야.”
|
이런 야자키의 발언은 책을 넘겨가는 우리들의 흐름을 방해한다. 잠깐 책에서 빠져나와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레이코의 말은 우리들의 질문이기도 하다. 야자키 아니 어쩌면 류는, 너무 상투적이지만 그만큼 진실하게 대답한다. “자기 자신은 어디에도 없는 거야.”
그렇다.‘모든 SM 플레이는 사회적인 행위’다. 현실에서의 상처는 허구의 영역에서 치유된다. 야자키와 게이꼬에게 개처럼 사육당하던 레이코의 내면에서는 오히려 세계에 관여하고 싶은 의지가 일어난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식물적으로 살았어요. 식물에는 오르가슴이 없어요.” 그것이 끝내 레이꼬가 야자키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 재 봉 소설가s2jazz@hanmail.net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