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까지만해도 인근 도원, 율목, 신흥, 내동, 창영동 주민 수천명이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생활을 했다.
40대 중반을 넘긴 인천 시민이라면 용동 큰 우물 물을 한번쯤 마셔본 기억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에도 용동 큰 우물은 항상 일정한 수위를 지켜 주민들의 안정된 식수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
인천시 지정문화재(민속자료 2호)인 용동 큰 우물은 1881년(고종 18년) 자연 우물을 재건한 것이다.
당시 쌓았던 우물 안 석축은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수의 손길이 필요없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졌다는 게 동네 주민들의 설명이다.
물이 달고, 끝맛이 시원해 과거에는 우물 주변의 인천·창영·대화 등 5개의 양조장이 이 물을 길어다 술을 빚었다. 양조장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마차를 동원해 물을 길어나르곤 했다. 이 물로 빚은 막걸리나 약주는 맛이 좋았다는 것.
심지어 일제시대 옛 축현초등학교 뒤편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후까미 양조장’은 이 우물에서 기른 물로 일본인이 즐기는 정종을 만들어 팔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3대째 용동에서 살고 있는 강국봉씨(49)는 “주전자를 들고 물을 받기 위해 용동 우물에 나오면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며 “물을 마시면 탄산수처럼 속까지 시원했다”고 말했다.
1910년대를 전후해 이 우물 주변에는 가정집보다 요릿집과 기생집이 자리를 잡았다.
인천에 있던 권번(券番·일제 때 기생들이 적을 두는 조합)중에는 ‘용동 권번’이 가장 유명했다. 기생집과 요릿집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으로 쌀 배급제가 시작되고 또 ‘술 배급제’까지 시행되자, 차례로 문을 닫았다.
그후 53년 5월 당시 대한중공업공사(현 INI스틸)가 국영기업체로 출발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렸고 이에 따라 ‘방석집’(여자들이 술시중 드는 집)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겼다. 80여곳이 성황을 이뤘고, 이곳에 종사하던 여자들도 200명을 웃돌았다.
인천시는 60년대 중반까지 큰 우물 바로 옆에 담배가게를 내주는 조건으로 가게 주인으로 하여금 우물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우물은 인천에 수돗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70년대 들어와 기능을 상실하게 됐다. 용동 큰 우물은 5,6년전 수질검사에서 세균이 검출돼 지금은 식수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중구와 인근 상인들은 용동 큰우물의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9월 ‘용동큰우물제’를 열고 있다.
올해로 7회째인 용동큰우물제는 사물놀이와 대동굿 12마당에 이어 지역의 무궁한 발전과 평안, 만복을 기원하는 제전 한마당으로 펼쳐진다.
주민 윤태방씨(58)는 “큰 우물제는 동네 주민들을 한마음으로 묶어 주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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