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국 영화에서 본 장면이다. 무디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등 신용평가회사들이 국가신용도를 평가할 때 설마 이런 것까지 따지랴. 영화니 이처럼 그럴듯하게 꾸몄으리라.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만은 아니다. 신용평가회사는 대상국의 정치사회 안정도를 주요 요인으로 넣고 있다. 국정 흐름을 예측할 수 있고 투명성이 높으면 신용도를 올린다.
올 1월29일 개각 때 진념(陳稔) 경제부총리는 유임됐다.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유임 배경이었다. 이는 국제 금융계에 긍정적으로 비쳤다.
두 달 뒤인 3월28일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인 ‘A3’로 한꺼번에 두 단계나 올렸다. 다른 신용평가회사도 한국에 대한 대접을 후하게 할 움직임이다.
3월 말 진 부총리는 뉴욕에 가서 ‘한국경제 설명회’를 가졌다. 경제정책 리더가 국제 투자가들에게 한국경제의 비전을 직접 설명함으로써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는 분석이다. 뉴욕 현장에 다녀온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는 다음과 같이 출장보고서를 썼다.
‘뉴욕의 은행 증권 보험사 등에 근무하는 한국인들로부터 한국경제 설명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설명회는 역대 최고였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평이었다. 한국경제의 체질이 좋아진 것과 함께 진 부총리 개인의 진솔함과 당당함도 호평을 받은 한 요인이었다.’
진 부총리가 경기도지사에 출마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에서 냉담한 반응이 나왔다.
해외 주요 기관투자가들은 “한국 경제정책이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니냐”고 질문하는 등 불안감을 나타냈다. 골드만삭스의 카를로스 코데이로 부회장은 진 부총리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경제 회생에 있어 무척 중요한 시기에 정부를 떠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블룸버그통신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12일자 칼럼에서 “한 개인에게 나라 경제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경우는 드물지만 한국은 사실상 그러한 셈”이라며 “진 부총리가 사임할 경우 해외투자가들이 한국경제를 걱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진 부총리는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지금도 없지만 공인으로서 여러 경로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여러 경로’라니, 누가 무슨 말을 했는가. 정치권의 요청은 ‘부총리 자리에까지 앉혀 주었는데 당이 어려울 때 발뺌하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냐’는 논리로 요약됐을 것이다. 이는 ‘깡패의 의리’ 논리와 별 다를 바 없다.
진 부총리는 진정한 공인이라면 이런 당리(黨利)를 초월했어야 했다. 지방선거에서 이겨 그 여세를 몰아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집권당의 속셈을 알았다면 경제관료의 자존심을 걸고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을 뿌리치는 용기를 가졌어야 했다.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들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올릴까 하다 최근의 이런 동향을 보고 재고(再考)할 것이 뻔하다. 재무장관과 여배우의 스캔들 사건보다 더 나쁘게 평가하지나 않았으면….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