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하던 날 임성빈 교수(58)는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잠시 머뭇거리자 임 교수는 “가끔 한번씩 단식을 한다”면서 “얼굴이 홀쭉해져 사진이 잘 나올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의 본업은 명지대 기획위원장 겸 교통공학과 교수. 하지만 ‘심심해서’ 밥을 굶는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임 교수는 ‘보통’ 교수가 아니다. 우선 공식적으로 갖고 있는 직함만 봐도 한국정신과학학회 부회장, 서울시우슈(중국무술)협회 회장, 한국한의학연구소 연구자문위원 등 전공과는 거리가 먼 직함이 많다. 여기에다 태권도는 4단, 바둑은 아마 5단이고 당구 300에 단소도 분다. 10년 전부터는 요가도 배우고 있고 단학선원에서는 법사 자격을 받았다.
그런 그를 경기고와 서울대 토목공학과 동문들은 ‘괴짜’ 또는 ‘기인’이라고 부른다. 임 교수는 “앞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만 뒤에서는 ‘미친 놈’이라고 부를 것”이라면서 “어떤 이들은 진짜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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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밥 대신 소주 1병에 맥주 3병을 마시는 독특한 ‘식사 습관’도 괴짜라는 그의 이미지에 한 몫을 한다. 또 택시 합승을 합법화 하자며 합승 요금을 손님별로 계산해내는 택시용 미터기를 발명한 데서도 엉뚱한 구석을 찾아볼 수 있다.
임 교수는 ‘꾼’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영어로 치자면 ‘프로페셔널’에 해당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꾼’의 자세로 덤벼든다”고 말했다. 대충 하다 말 일이라면 아예 시작을 않고 일단 손을 대면 끝을 봐야한다고.
‘손을 댄’ 여러 가지 관심 분야가 똑같이 재미있을까. 임 교수는 ‘계절론’을 들어 설명했다.
“봄에는 꽃이 만발해서 좋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하는 재미가 있죠. 계절마다 제각각 멋이 있고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봄을 좋아해’라고 스스로를 옭아매 버리면 계절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확 줄어버리고 말죠.”
많은 사람들이 ‘나의 관심사는 이것’하고 한정시켜 버리는 탓에 주변의 또다른 즐거움은 스스로 포기한다는 얘기였다.
하는 일이 그렇게 많다보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돈이나 출세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줄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얼마든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 그게 안되니까 ‘할 일은 많은데 인생은 짧다’고 투덜거리는 거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다보니 남다른 에피소드도 많다. 70년대 조교 시절 배운 침술은 특히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 임 교수는 “정식 의사가 아니면서 한 거라 얘기하면 안되는데…”라며 주저하다 “하기야 이젠 공소시효도 지났을테니까”라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환자들이 모두 주변 사람들이고, 돈도 안받으니까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침을 놓아준 게 계기가 됐습니다. 침을 맞은 사람들이 용케도 한 번만에 아픈데가 낫더라구요. 한 두 번 그런 일이 이어지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전문의가 아니라 곤란하다’고 손을 저으면 아내는 ‘일부러 찾아온 손님을 어떻게 박대하느냐’며 등을 떠밀고….”
그러던 중 하루는 아내가 연탄가스에 중독됐다가 임 교수의 침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마누라 살리려고 침을 배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생각에 그 뒤로는 침에서 손을 떼고 대신 한의학 전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임 교수는 말했다.
바둑에 대한 임 교수의 열정은 의미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고건 서울시장이 명지대 총장이던 때 고 총장과 바둑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98년 명지대에 세계 최초로 바둑학과를 개설한 것.
명지대 용인캠퍼스 교수마을에 자리잡은 아담한 목조주택은 임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재산 가치가 하나도 없는’ 집이다. 하지만 집안 곳곳에는 “누구보다도 풍요롭게 살아왔다”는 그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3000장이 넘는 음반에다 무속학 한의학 정신과학 등 분야별로 가지런히 꽂힌 책들, 2000개가량의 영화비디오테이프, 20여개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민속 제품들….
“삶이란건 ‘퍼즐 맞추기’라고 생각합니다. 잘게 나누어진 조각을 경험을 통해 하나씩 찾아가는 거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그만큼 조각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삶의 전체 그림에 조금더 가까워지리라 기대합니다.”
▼임교수의 '취미 철학'
임성빈 교수는 “여러 분야에 몰두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았다”고 말한다. 단순한 취미나 소일거리 정도를 넘어 인생의 지혜를 깨닫게 됐다는 것. 다음은 임교수가 관심 분야별로 얻은 삶의 지혜와 철학.
바둑의 요체는 ‘나눠 가지는 것’이다. 물론 승부가 걸린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해야 한다. 사람들은 종종 승패에만 매몰돼 ‘독식(獨食)’을 하겠다는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욕심을 부릴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바둑이다. 포기할 건 포기하면서 상대방보다 ‘조금만 더’ 가져오겠다는 생각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
듣고 있노라면 멜로디나 리듬같은 단순한 요소를 넘어 뭔가 심오한 느낌이 전해진다. 서양 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 모호하게 들리겠지만 인생의 본질로 이끌어주는 느낌이랄까.
환자를 대하면서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생명은 한정된 것이라는 점. 환자들은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키려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무엇을 하면서 사는게 한정된 삶을 보람있게 사는 건지 좀더 고민하게 됐다.
현대의 과학은 물질문명에 본질을 두고 있다. 객관성이 있고 재현이 가능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 육체는 물질적인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정신은 그럴 수 없다. 정신의 문제를 먼저 따져보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큰 눈으로 바라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지만 좋았던 일들은 ‘추억’이라는 저장 장치를 통해 남는다. 그리고 지나온 삶을 장식했던 그 추억은 오늘의 일상도 풍요롭게 해준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으므로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추억을 저장해두는 게 좋다.
용인〓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