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난생 처음 하위 계층으로 밀려나게 된 전(前) 중산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매우 심각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이 상위 계층에 대한 적개심을 일상의 고달픔 이상으로 증폭시킨다든지 계층간 평등을 보다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코 이상한 일일수도, 의외의 현상일 수도 없다.
▼정부失政 되레 여당에 유리▼
지역간 갈등도 그렇다. 정권의 등장 자체가 노골적인 지역 연합에 기초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인사권 행사에 있어 지역 차별이 오히려 더 명료해졌다는 평가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차별의 시정 과정에서 나타난 임시적 현상이라고 강변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지역감정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차별이건 역차별이건 간에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히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 결과 영남의 권력 재탈환 욕구를 강화하게 되었고 호남의 권력수호 의지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역 정서를 대표하는 정치적 대리인 확보에 최우선적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마음을 보다 굳건하게 만든 것이다.
정보강국을 지향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정보 격차의 시정 문제에 크게 유의하지 않은 결과는 심각한 세대간 격차를 낳았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인터넷에 접속하는 네팅 제너레이션과 구 미디어에 의존해 정보를 수집하는 구세대 사이에는 단순히 정보의 양적 격차나 단절 현상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회정책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의 모색이 서로 다르게 되고 말았다.
특히 인터넷 세대의 수평적 세계관과, 수직적 얼개에 순치되어 살아 온 구세대의 생활태도 사이에서는 공적 과제에 대한 열정과 간여의 강도가 서로 다르게 되었고, 구 미디어에 대한 의존도나 평가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도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사회의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이격과 갈등이 지난 5년 동안 보다 더 심화되었다고 한다면 대의민주주의의 철학적 원리 면에서 볼 때 당연히 현재의 집권세력에 그 책임을 물어야 마땅한 일이다. 바로 그것이 책임정치와 교체임용주의를 채택하는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바로 이런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대립의 격화가 오히려 집권세력이 내세울 것으로 유력시되는 대통령 후보가 정치적 기반을 넓히는 토양으로 삼는 모순과 풍자의 현상을 낳고 있다. 노무현 돌풍은 기실 하위 계층으로 밀려난 전 중산층의 평등지향주의에 의해 호위되고 있으며, 영호남의 지역 연합을 통해 권력을 재창출하려는 신종 지역주의에 의해 추동되고 있고, 나아가서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하는 신세대의 열정주의와 연대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여당에 불리하고 야당에 유리할 것 같은 집권세력의 성적표가 오히려 여당에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갈등과 대립의 과제를 놓고 여당, 특히 노무현씨는 감성적 접근을 시도하는 데 반해 야당, 특히 이회창씨는 이성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칼 정은 미국의 정당을 평가하면서 이념의 수렴 현상이 일상화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정당을 이념 차원이 아니라 심리 차원에서 평가하는 것이 옳으며, 그 중에서도 감각 지향성과 사고 지향성을 기준으로 구별해야 제격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다. 나아가 21세기의 평등 지향적, 즉응적, 단세포적 사회구조 속에서는 사고 지향적 접근이 아니라 감성 지향적 접근이 보다 더 호소력이 크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시대´못읽어 호소력 상실▼
그렇다면 야당이 ‘죽을 쑤는’ 이유는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진단하고 이에 대처해 나가는 전략적 대안 모색의 열정이나 능력이 여당보다 못한 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구태의연한 자세로는 새로운 시대의 정치적 요구를 선도할 수 없다는 신호가 아닐까. 역시 여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야당이 제 역할을 못해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는 평가가 제격인 것은 아닐까. 이런 대목이야말로 이 시점에서 야당이 반추해 보아야 마땅한 과제들이라고 생각된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의회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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