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타]잉글랜드 ‘그라운드의 신사’ 보비 찰튼

  • 입력 2002년 4월 17일 17시 52분


보비 찰튼이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힘을 실은 묵직한 강 슛을 날리고 있다.
보비 찰튼이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힘을 실은 묵직한 강 슛을 날리고 있다.
항공기 추락사고 생존자에게는 기적이라는 표현이 붙는다. ‘인명은 재천’이란 말처럼 하늘이 살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라운드의 신사’라는 보비 찰튼(영국)도 ‘기적의 사나이’였다. 1958년 2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찰튼은 유고 베오그라드로 원정경기를 떠났다. 홈팀 레드스타와의 유러피언컵 준준결승에서 2골을 터뜨리며 팀 승리를 이끈 뒤 준결승 티켓을 안고 들뜬 마음으로 귀국 길에 올랐다. 중간 기착지 독일 뮌헨에 도착할 때만해도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가올 4강전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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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폭설이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찰튼을 포함한 선수단을 태운 영국행 비행기는 뮌헨 공항을 이륙하다 추락, 기체가 두 동강났다. 이 사고로 맨체스터는 주전 7명과 임원 3명을 잃었고 매트 바스비 감독도 중상을 입었다. 축구 역사에서 ‘뮌헨의 비극’으로 명명된 참사에서 찰튼은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유고전에서 활약한 덕분에 일등석에 앉았던 것이 행운이었다. 당시 찰튼은 “하늘도 그의 재능이 아까워 살려주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찰튼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했기에 이런 찬사까지 돌았을까.

2000년 5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보비 찰튼이 청각장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슈팅 시범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찰튼은 1937년 10월 영국의 탄광마을 아싱턴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가 저물 때까지 얼굴이 새카맣게 되는지도 모른 채 뛰어다니다 바스비 감독의 눈에 띄어 1953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맨체스터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 1956년 정식 프로무대에 뛰어들어 데뷔전에서 2골을 장식하며 스타 탄생을 알렸고 팀에 리그 3차례 우승을 안기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

‘뮌헨 참사’에 따른 정신적인 충격을 딛고 58년 잉글랜드 대표에 뽑힌 그는 홈에서 열린 66년 월드컵에서 홈팬의 열렬한 응원 속에 사상 첫 우승컵을 안았다. 결승에서는 베켄바워가 이끈 서독을 연장 끝에 4-2로 승리하는 데 한몫 해냈다. 특히 같은 축구선수인 형 잭과 함께 뛰어 우승을 엮어낸 까닭에 기쁨은 더욱 컸다. 월드컵 사상 형제 우승은 찰튼 가문이 두번째였다.

월드컵 우승으로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의 자존심을 곧추 세운 찰튼은 항공기 사고로 세상을 뜬 동료들의 영전에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안기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1968년 마침내 결승에 올라 포르투갈의 강호 벤피카 리스본를 맞아 헤딩슛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연장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4번째 골을 터뜨려 4-1 승리를 맛봤다. 정상에 오른 뒤 찰튼은 “10년이 흘러 이제야 약속을 지켰다”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신(1m74)의 핸디캡을 지녔지만 플레이메이커와 스트라이커를 넘나들며 빼어난 개인기를 펼쳤고 깨끗한 매너도 돋보였다. 왼발의 명수로 대포알 같은 장거리 슛이 트레이드마크. 리그전 751경기에서 245골을 기록했고 A매치 106경기에 출전해 올린 49골은 여전히 잉글랜드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찰튼은 1973년 은퇴 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대사로 전 세계를 돌며 축구 보급과 꿈나무 육성에 앞장서기도 했다. 찰튼에게 붙은 ‘경(Sir)’라는 칭호는 그의 화려한 행적에 비하면 오히려 부족할 정도였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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