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일수/´최총경 도피´ 검찰 뭘했나

  • 입력 2002년 4월 17일 18시 31분


경찰청 전 특수수사과장 최성규 총경이 14일 오전 표연히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갔다. 그에 대한 출국금지조치를 취하려던 검찰은 하루가 지나서야 그의 출국사실을 알았다. 40여명의 특수수사과 요원들을 풀어 그의 행방을 쫓던 경찰청도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하고 직위해제 조치에 들어갔다.

최규선씨를 이권개입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최씨의 비서 전호영씨는 일찍부터 최 총경을 최씨의 비호세력으로 지목한 바 있다. 이 때까지 최 총경의 연루의혹이란 최규선씨 부탁으로 S건설 유모 이사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청부수사를 했다는 점과 김희완 전 서울시 부시장의 부탁을 받고 의약분업과 관련된 서울 강남의 한 병원 수사과정에 개입했다는 점 정도였다.

▼검찰 비웃는 비리의혹 인물▼

하지만 12일 밤 최 총경은 ‘최규선 게이트’ 연루의혹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심야 대책회의를 가진 사실이 언론에 추적되면서, 사건의 심상찮은 핵심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자아냈다. 사정이 이쯤 되었으면 늦어도 13일이 다 가기 전에 검찰은 최 총경을 최규선씨 사건 관련 출국금지자 명단에 추가하는 기민한 조치를 취했어야 옳다.

수사는 흔히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인권시비가 짙은 심야수사나 철야수사와 같은 수사관행을 우리는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촌각이 아쉽기 때문이다. 검찰이 출국금지조치를 취하러 나섰지만 최 총경은 이미 날아가 버린 뒤였으니, 이건 마치 큰 일을 감추기 위해 사건의 열쇠를 쥔 핵심인물을 작당하고 빼돌린 게 아니냐는 또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최 총경은 문제가 된 심야 대책회의에 참여하기 전에 청와대에도 들렀다고 한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이른바 ‘사직동팀’ 해체 이후 그 역할을 대신해 온 경찰 내의 특수 조직일 뿐만 아니라 청와대와 직통하는 막강한 조직이기도 하다. 그런 부서의 실무책임자가 지휘 계통의 상급자들에게 자신의 거취에 관한 일체의 상의도 없이 무단으로 직무를 이탈해 도주했다니 도무지 상식적으론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형편이니 검찰수사는 그의 도피를 연출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는지, 배후세력의 조직적인 방조가 있었는지 하는 의혹을 비켜가기 어렵게 되었다.

각종 게이트나 권력형 비리의혹의 열쇠를 쥔 핵심 인물들이 번번이 수사망을 피해 국외로 달아나고, 사건은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김이 빠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예삿일이 아니다. 이 땅에 법과 정의가 살아 있다면 이런 일이 어찌 그리 쉽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국기를 뒤흔드는 이 같은 패역의 빈발을 막고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최 총경의 신병을 찾아 제자리에 세우는 일에 전 국가조직과 정부기관들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범인들의 은신처가 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들과 조속히 범인인도조약을 체결하도록 외교적인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최 총경의 도피행각은 단순한 개인 차원의 범죄에 그치지 않는다. 청와대의 하명수사를 맡아 권력핵심과 교감하던 공직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대통령의 무거운 부담으로 돌아갈 의혹을 증폭시키면서까지 파렴치범이나 흉내낼 줄행랑을 친대서야 말이 되는가. 그런 인격을 믿고 일을 맡겨온 청와대는 무엇 하는 곳이며, 그가 일찍이 몸담았던 군과 경찰의 기강과 명예는 또 무슨 꼴인가.

최 총경이 도피성 출국을 감행한 다음날, 김해 돗대산 정상에 중국민항기가 추락하는 대 참사가 발생했다. 같은 날 봄 가뭄을 씻어 내리는 넉넉한 비가 내렸는가 하면 그 빗줄기가 폭우가 되어 침수 피해와 각종 추락·충돌사고들을 낳았다. 정권 말기에 접어든 김 대통령 세 아들의 비리소문이 연일 그칠 줄 모른다. 전직 대통령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젖어 국가 대사들을 앞둔 국민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신병찾아 법 위엄 보여야▼

이제 검찰이 의혹의 핵심인물인 최규선씨를 소환조사하기 시작했으니 그 귀추가 주목된다. 비록 악이 성하고 부패가 만연한 땅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결연히 악과 부패를 마주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사건이 꼬이기 시작한 듯 보이나 검찰이 원칙에 충실하면 의혹의 껍질은 낱낱이 벗겨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뢰받는 국민의 검찰’이 져야 할 몫이다. 권력의 정상 위에 법과 정의가 있다는 사실을 검찰이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김일수 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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